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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금강소나무

by 안규수 2023. 12. 1.

                                                         

          금강소나무는 우리나라 금강산을 중심으로 강원도 경상북도 북부지역, 제주 영실에 자생하며 줄기가 곧게 뻗어 자란다. 목재는 가볍고 연하며 솔향이 강하다. 그럼에도 저마다 특유의 개성을 가지고 있으며, 험한 환경에 적응력이 탁월하고 그 줄기에서 자연을 이겨내는 나무의 강한 생명력과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소나무는 나무 중에서도 고고한 선비의 기풍을 지녔다. 성인군자요, 덕망 있고 격이 높은 어른이다. 오천 년이 넘은 세월, 온갖 풍상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이 땅을 푸르게 지켜왔다. 천년을 산다는 학鶴은 소나무에만 앉는다고 한다.

  보통 침엽상록수의 경우에 중심 줄기가 곧게 일자로 높게 뻗는 것이 특징이나, 소나무껍질은 적갈색이며 나이를 먹을수록 표면이 거북이 등껍질과 같은 모양으로 갈라지는데, 이 모양이 마치 철갑을 두른 듯 보인다고도 하여 이를 애국가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게다가 상록수이기도 하니 냉해도 잘 견뎌서, 어떠한 엄혹한 추위에도 이를 견뎌내고 힘을 뿜어내는 그런 기상을 보여준다고 하여 조선시대 선비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은 나무이다.

  고향 풍경은 울창한 솔숲이 자리 잡고 있다. 솔향을 품었던 공기와 바람과 햇살의 냄새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계절의 순환에 따라 그 모습이 다르다. 봄에는 소생의 기쁨, 여름에는 성장의 생명력, 가을에는 희생과 성숙, 겨울에는 인내와 기다림을 가르친다. 봄이 오면 소나무는 그 잎이 푸름을 지나서 검게 물이 오른다. 그럴 때면 동무들과 마을 뒷산에서 송기를 벗겨 먹었다. 낫으로 껍질을 벗기면 속살이 보이고 그것을 벗겨내 먹으면 솔 내음이 향기롭고 달았다. 하지만 그런 철없는 행동이 나무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는 일이라는 걸 나이 들어 알았다.

  오월이면 노란 송홧가루가 숨이 막힐 정도로 하늘을 뒤덮었다. 그 향긋한 솔 내음도 잊을 수가 없다. 동무들과 솔가지 숲에 숨어 빠끔히 내다보는 하늘은 도라지꽃인 양 그 빛이 짙었고 어디서인가 푸르릉거리는 이름 모를 새들은 별빛 같은 몽롱한 노래를 흘려서 고요한 적막을 깨뜨리곤 했다.

  율곡 이이는 세한삼우歲寒三友로서 송松 · 죽竹 · 매梅를 꼽았고, 윤선도는 시조 오우가에서 소나무를 벗으로 여겼으며, 추사 김정희는 세한도에서 어려울 때 도와준 친구를 위해 그 고결함을 기리는 마음에서 겨울철 소나무를 그려주기도 했다.

솔은 장미처럼 요염한 꽃을 피울 줄도 모르고 화려한 향취를 뿌려 뭇 나비들을 부를 줄도 모른다. 하지만 오랜 비바람에 시달린 노숙한 모습은 화가의 신비로운 붓끝에서 빚어진다. 침형으로 된 잎이 서로 얽혀 난잡스러울 듯하지만 그렇지 않고 의좋게 짝을 지어 한 줄기에 질서 있게 붙어서, 맵고 거센 설한에도 꿋꿋이 버티는 기개가 가관이다. 날 듯 말 듯, 그러나 다시 한번 맡으면 확실히 무거운 저력을 가지고 내 코끝을 압박하는 붓끝의 향취도 솔향을 닮았다.

  우리 집도 자자손손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우거진 솔숲 사이 계곡의 전답에서 농사지으며 살아왔다. 고향 빈집은 늙은 어머니가 자식을 기다리는 모습을 닮았다. 모진 바람과 뜨거운 태양을 견디고 버텨 선 육신이 삭아져 내린 채. 어머니가 보고 싶어 시간이 켜켜이 쌓였을 집 안으로 들어가 ‘엄마’하고 불러 본다.

  어릴 적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을 사립문이나 대문에 걸었다. 이 금줄에 걸리는 것이 소나무 가지이다. 금줄에 '禁'의 '금한다.'라는 의미는 잡스럽고 삿된 것을 막는 힘이 소나무에 있다고 조상님들은 믿었다. 무엇보다도 소나무의 그 푸른빛은 생명의 상징으로 여겼다. 나무 중 일품은 사시사철 푸름으로 지조를 잃지 않는 금강소나무이다. 그래서 소나무는 의와 충을 상징한다. 단종 복위 사건으로 혹독한 고문 끝에 죽음을 앞둔 성삼문의 마지막 남긴 피 묻은 노래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꼬하니

   봉래산 제일 봉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봉래산 제일 봉에서 백설이 내려도 독야청청하리라는 처절한 절의가이다. 이런 충의가忠義歌가 어디 또 있으랴.

  제주 영실 금강소나무 숲. 검은 현무암 틈에서 풍기는 향긋한 바다 냄새, 싱그러운 솔향, 소나무 가지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살랑거리며 내는 바람 소리가 좋다. 영실 계곡의 기기묘묘한 기암괴석과 하얀 거품을 뿌리며 굽이굽이 흐르는 계류 수는 천상에서 흘러온 물처럼 맑다. 돌 틈 사이에 졸졸 흐르는 물에는 생명의 신비가 있고, 붉은빛이 감도는 소나무 사이사이에는 천년의 숨결이 흐른다.

  솔숲은 새들의 보금자리다. 봄여름 가을 할 것 없이 뭇 새들이 숲으로 날아든다. 동고비, 곤줄박이, 붉은머리오목눈이, 쇠박새, 노랑텃멧새, 방울새, 꾀꼬리, 뻐국새, 멧비둘기, 쇠찌르레기 등. 마음이 울적할 때 숲을 거닐면 새들의 울음소리에 슬픔이 있고, 바위틈 새를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도 그리움이 묻어있다. 소나무는 계절의 순환에 따라 변신한다. 봄에는 소생의 기쁨을, 여름에는 울창한 성장의 보람을, 가을에는 희생과 성숙을 그리고 겨울에는 인내와 기다림을. 어느덧 가을이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마다 조금씩 소멸을 준비하는 모습이 완연했다. 문득 소슬한 바람이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몇 년 전 추석 무렵 고향을 찾았다. 마을 어귀에서 뒷동산을 바라보니 언제나 나를 반겨 주던 큰 소나무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고향을 잃어버린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 소나무 아래에서 함께 놀던 동무들도 다들 어디로 떠나고 없다. 언제나 소슬바람에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지금껏 살아온 삶을 돌아보라는 듯 말없이 바라보던 그 소나무는 어디로 갔을까. 온 가족이 모두 먼 길 떠나고 그 소나무 마저 가고 없으니 오직 나 홀로 남았다. 순간, 외로움이 물밀듯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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