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은 애틋하다. 뭍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 늘 동경의 대상이다. 이른 봄날, 비행기가 섬에 가까워지면 백록담이 허리에 운무를 두르고 웅장한 자태로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희뿌연 안개 낀 섬 위로 봉긋 솟아있는 백록담은 환상의 섬이 가진 자연미의 극치이다.
협제 해수욕장 앞 비양도의 아름다운 바다의 매혹에 빠져 드나든 지가 퍽 오래되었다. 그뿐 아니라 틈만 나면 중산간 곶자왈 숲에서 나무와 피어나는 꽃들을 찾아 나섰다. 저마다 제자리에서 욕심도 이기심도 없이 꿋꿋이 살아가는 모습이 아름답고 소중했다.
나는 섬의 신비를 찾아 20여 년 전부터 제주의 속살을 누볐다. 완만하고 부드러운 오름의 곡선, 신비의 춤을 추는 제주의 바람, 태곳적 검은빛의 현무암, 우레를 머금은 구름의 질주, 용광로처럼 끓어오르는 노을, 하늘을 향해 절규하는 나무들…. 걷기는 빛으로 가득한 숲에서 자유와 고요함 속으로 몸을 끌고 전진의 리듬에 몸을 맡기는 일이다. 걷기의 효과는 무엇보다도 사유와 감각의 풍요를 일군다.
섬은 영원한 유토피아였다. 하지만 순수한 섬의 모습은 사람들의 발길에 잦아지면서 인위적인 모습으로 변해 가고, 본래의 아름다움은 점점 훼손되어 갔다. 아깝게도 섬의 태곳적 신비인 ‘이어도’는 사라졌다. 이처럼 사람들의 발길처럼 무서운 것도 없다.
동이 틀 무렵 떠오르는 태양은 생명의 기운이 있다. 나는 새벽녘과 저물녘의 어슴푸레한 빛을 좋아한다. 이른 새벽 미명의 시간 들뜬 마음으로 현무암 바닷가를 걸었다. 바다와 하늘은 경계도 없이 아침 햇살을 핏빛으로 물들었다. 모든 게 붉다. 바람도, 사람도, 섬 빛을 머금은 검은 돌도. 왜, 새벽녘과 저물녘 뜨고 지는 붉은빛을 모두 노을이라 했을까. 노을은 치자 색깔의 빛, 그건 이제까지 경험되지 않은 이제 막 창조된 시원의 순간처럼 싱싱해서일까. 그런 아름다움도 잠시일 뿐, 바닷가 현무암 바위 사이에 버려진 어구 생활 쓰레기들로 그득했다. 마치 그 쓰레기가 보기 싫어서 바다는 바위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는 듯 보였다. 청정 해안가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여기저기 버려진 쓰레기에 고통을 받고 있었다.
한라산 중산간 마을 밭담 길을 걸었다. 층층이 밭을 에워싸고 있어서 울타리가 되는 돌담은 어머니가 자식을 품듯 방풍 역할을 했다. 울담은 반듯하게 쌓아 돌출된 돌에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배려로 보였다. 촘촘히 쌓은 돌 틈 사이로 바람길을 낸다. 바람길은 이 길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의 숨소리, 발걸음을 기억하고 있다. 바람을 본 사람들은 없지만, 돌담 사이를 다니는 바람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이런 돌담이 언제까지 우리들의 시야에 남아 있을까 그것도 알 수 없다.
오래전 영화 ‘늑대와 춤을’ 영화에서 추장은 백인들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으면서 이런 말을 남긴다.
“마지막 나무가 사라진 후에야, 마지막 강이 더럽혀진 후에야, 마지막 남은 물고기가 잡힌 후에야 그대들은 깨닫게 되리라.”
추장의 유언이다. 오늘 우리가 겪고 있는 자연이 난개발과 오염으로 망가지는 걸 예언하고 있는 듯 보인다. 오늘의 현실을 예언한 메시지가 강렬하다.
섭지코지 카페에서 한나절 일출봉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 있었다. 수천 년 세월 속에서 묵묵히 인류의 마지막 보루처럼 의 연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외롭고 쓸쓸했다. 바다 위에 일렁이는 바람은 거침없이 달리다가 힘에 겨운 듯 긴 호흡을 가다듬는 중이다. 절벽 아래 촛대 모양으로 삐죽 솟은 바위는 용왕의 아들과 하늘나라 선녀에 대한 슬픈 짝사랑의 전설이 담긴 선돌이다. 하늘을 향해 치솟은 돌 정수리에 온통 가마우지 배설물로 현무암이 허옇게 변해 있다. 이것도 오염이지 싶다.
날이 저문다. 빛이 공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과 바닷물이 시간 속을 드나드는 모습이 닮아있다. 이 흐름 속에서 시간과 공간, 어둠과 밝음 등 인간이 설정해 놓은 개념들은 스스로 소멸한다. 자연이 원래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듯 시각적 착각을 일으킨다. 빛은 모든 순간마다 명멸하지만, 바다에서 빛의 죽음은 고요하고 가지런하다.
동백 숲길을 걸었다. 숲은 뭇 생명을 품고 있다. 조금 들어가면 4.3 사건의 슬픔이 잠겨 있는 동굴이 나타난다. 새들이 슬피 운다. 이 동굴에 숨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참히 학살당한 젊은이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는 것 같았다. 스치는 솔바람처럼 역사는 그저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긴 여운을 남긴 숲의 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고독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웃고 울고, 사랑도 하고 미워도 하며, 슬퍼하고 분노하면서 살아온 삶의 여정을 숲이 달래준다. 나는 현실의 그물에 갇혀 우울할 때 이런 고즈넉한 공간에서 삶의 에너지를 충전 받고 회복한다.
나는 걷는다. 숲에는 ‘자유’가 있다. 숲에서 지저귀며 나는 새, 풀을 뜯어 먹는 노루처럼 자유를 즐긴다. 상상하고 생각을 곱씹으며 걷는 동안 몸은 숲의 생생한 기운이 몸을 적신다. 그러면 가슴 한쪽에 맑은 샘물이 솟듯 기쁨이 일렁인다. 봄날 모란꽃 피는 것, 가을날 하늘을 무리 지어 나는 새들! 이들은 타고난 천재에다 게으름도 모른다. 어찌 내 한 줌의 재능이 그들의 발치에라도 미치랴! 내가 마음으로 흠모하고 섬기는 참 스승들이다.
곶자왈 숲나무들은 주어진 환경에 맞게 모든 걸 작게 줄여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다. 다닥다닥 붙은 아파트에 살아가는 군상 群像들처럼. 푸른 바다와 바람에 일렁이는 숲길은 기억의 밑바닥에 달라붙은 앙금조차 다 녹일 수 있고, 석양 노을빛 같고, 흰 눈빛 같다. 서산에 걸린 달빛 같은 나이임에도 봄날 찻잎 새순 같은 생명력이 솟아난다. 하지만 이 숲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있는 수많은 발길 속에 내 발길도 있지 않은가.
해를 묵어갈수록 내 모습을 반추하면서 피곤한 마음을 재충전하고 숲을 벗어난다. 이 숲에 언제 또 오려나. 금방 또 오고 싶지만 몸이 마음을 따라 주지 않으니 설움에 목이 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