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추사 김정희 적거지기념관 <세한도>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나목, 둥그런 창문 있는 작은 집이 매운 제주의 찬바람 속에 떨고 있다. 세한 속에서 얻은 불가사의 해탈과 무한 광대하고 둥근 깨달음은 텅 빈 하늘을 빨아들인 신묘한 힘이었다. 대정읍 성 동문 안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초가 4채가 있고, 시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어린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하던 때, 추사는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다시 연루되어 9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된다. 섬에 위리안치된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귀양살이하는 스승을 숭모하고 따르는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중인 출신 역관이자 시인이었던 이상적은 스승에 대한 의리와 사랑을 실천하는 실학자로 청나라를 드나들 때마다 그는 신학문에 대한 귀한 서적을 수집하여 스승에게 보내드렸다. 당시 청국의 신학문에 관한 서적 한 권은 집 한 채 값이었다고 한다.
이상적이 추사의 귀양살이 4년째인 1843년에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를 북경에서 구해서 보내준 데 이어 이듬해인 1844년에는 「황조경세문편」을 구입하여 보내준다. 「만학집」의 저자인 계복은 추사가 옹방강, 완원과 교류하면서 알게 된 인물로 추사는 그의 학문을 흠모했다. 더욱이 이 책에는 옹방강이 제명을 쓰고 완원이 서序를 써 추사로서는 감격스러운 선물이었다. 추사는 스승 완원과 한 약속을 생각하며 세한도에 완당玩堂이라는 호를 썼다.
추사는 '실사구시 온고지신實事求是 温故知新'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경학, 기굴하고 고졸하고 현묘한 추사체의 글씨, 난, 수묵화 등 특출한 세계를 성취한 삼절三絕이지만, 결코 오만한 천재는 아니었음을 <세한도>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 추사는 북학파의 선구자였으며,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 속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부정부패를 바로 잡고, 근대문물을 받아들이려는 쪽에 서 있었다.
나는 이 그림에서 ‘장무상망’이라는 낙관이 눈에 들었다. 이 네 글자의 출처는 중국 섬서성 고대도시 시안西安이다. 기와집 와당을 연결할 때 쓰이는 막 새에는 통상 쓰는 그림 무늬가 아닌 이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고 한다.
유홍준 박사는 “<세한도>의 예술적 가치는 그 실경實景에 있지 않다. <세한도>는 문인화다. 문인화는 마음속의 정신세계를 표출하는 사의寫意를 중시하는 그림이다. 추사의 발문에 그 사의가 들어있다.”라고 말한다. 쩍쩍 갈라지는 갈필과 건 묵으로 그린 나무와 사람 없는 빈집의 풍경은 추사의 마음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질 좋은 종이보다 거친 종이에 그린 것도 그렇다. 추사가 유배되지 않고 여전히 벼슬자리에 있어도 이런 일들이 가능했을까. 그는 이상적의 사람됨을 공자의 말씀을 빌려 칭찬하고 있다. “가장 추운 때에 보면 소나무 잣나무가 가장 나중에 시들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고. 오주석은 <세한도>에 관한 글에서 그림 속 나무와 빈집을 이렇게 해석했다.
"이것은 집이 아니라 추사 자신이었다. 그래서 창이 보이는 전면은 반듯하고, 역원근逆遠近으로 넓어지는 벽은 듬직하며, 가파른 지붕 선은 기개를 잃지 않았다. 우뚝 선 아름드리 늙은 소나무를 보라! 뿌리는 대지에 굳게 박혔고, 한 줄기는 하늘로 솟았는데 또 한 줄기가 길게 가로 뻗어 차양처럼 집을 감싸 안았다. 그 옆에 곧고 젊은 나무가 서 있다. 이것이 없었다면 집은 그대로 무너졌으리라.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 제자 이상적이다. ‘세한도’엔 추운 시절에 더욱 따스하게 느껴지는 옛정이 있다. 그래서 문인화의 정수라 일컬어진다.”
변함없이 푸른 소나무는 제자 이상적을 상징한다고. <세한도>에는 추사의 고달픈 현실도 함축 되어있다. 추사는 <세한도>라는 세 글자를 오른쪽 위에 쓰고, 그 옆에 세로로 ‘우선 이상적에게 준다’라고 쓰고, 아래 제명 밑에 ‘長無相忘’(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마세) 라는 낙관을 손수 새겨 찍었다. 이 한마디에 시공을 초월한 사제 간의 인간적 함의, 정신적 교감이 큰 울림을 준다. 그래서 <세한도>는 단순히 그림에 머물지 않고 보는 이의 감성에 따라 그 의미가 넓게 번지고 출렁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린다. 나는 뒤편 추사가 기거하면서 제자를 가르치던 가시울타리 속 초가집을 찾았다. 추사가 몸을 뉘었던 ‘밖거리(사랑방)’를 한참 기웃거렸다. 그는 종기 등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고독한 유배인으로서 뼈를 깎는 자기 성찰을 통해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는 유배의 신산한 삶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난초 치기를 즐길 수밖에 없었다. 글씨 한 점 한 획, 난초의 잎사귀 하나, 그림 한 폭에 혼신을 기울인 그의 혼이 깃든 방안은 아직도 은은한 묵향이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 옆 작은 방이 기생 초의가 낳은 상우가 아버지를 수발하면서 기거하던 방이다. 소실 초의는 노후의 추사를 곁에서 끝까지 지켜 준다. 그런 초의를 향해 고마운 마음을 한 편의 시詩를 남긴다. “난초를 사랑하는 마음은 수선화를 사랑할 수도 있네,”라고.
다시 기념관으로 돌아와 추사의 작품 앞에 섰다. <세한도> 속의 초가 바람벽에 뚫려 있는 동그란 구멍을 그린 작품으로 그 큰 구멍은 지붕과 바람벽 옆에 서 있는 소나무 잣나무를 다 삼킨 하얀 태허太虛 속의 거대한 동그란 구멍이었다. 추사는 거대한 구멍 왼쪽에 “돌아가자, 돌아가자, 시원의 한 한가운데로”라고 쓰고 오른쪽에는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썼다. 그 밑 더욱 작고 가는 글씨로 ‘승련노인 추사 김정희’라고 썼다.
나는 추사의 신필神筆 뒤에 가려져 있는 전혀 다른 추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그림과 글씨 속에서 그가 살아온 시대의 아픈 역사의 행간을, 그의 인간적인 고뇌와 고독, 아픔을 읽을 수 있어 숙연히 옷깃을 여미었다. 짙푸른 태허 속 동그라미 속으로 그는 검은 댕기 두루미 한 마리로 변신하여 훨훨 날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