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창비에서 출판한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체험 소설이다. 이 책은 작가가 빨치산의 딸이라는 태생적인 아픔을 소설로 잘 녹여낸 책이다. 정지아 작가는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 소설을 쓰면서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수용했다고도 한다. '태어나보니 빨갱이의 딸'이라는 굴레를 누가 쉽게 벗어날 수 있었겠는가?
정지아 작가는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다. 1990년 《빨치산의 딸》이라는 장편 소설로 데뷔했다. 이 소설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실제 자신이 빨치산의 딸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전남도당 조직부장 정운창,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남이다. 이 소설은 이적표현물로 지정, 판매 금지 10년 만에 2005년 재출간했다. 하지만 이후 2006년 《봄빛》으로 한무숙문학상, 2020년《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로 김유정문학상, 이외에도 심훈문학대상, 이효석문학상, 올해의 소설상, 노근리 평화문학상 등 다양한 문학상을 수상하며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우연히 '뭐라도 남기리'라는 털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배우 김남길과 이상윤이 바이크를 타고 구례에서 '정지아'작가를 만나는 내용이었다. 구례는 정지아 작가의 고향이고 작가 아버지의 삶터였다. 나도 고향이 벌교라 어릴 때 빨치산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빨치산들에게 작은누나와 매형을 잃은 아픔도 있다. 책을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텔레비전에서 정지아 작가를 보자마자 바로 책주문을 하고도 몇 날이 지나서야 비로소 읽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책을 덮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죽었다.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평생을 정색하고 살아온 아버지가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진지 일색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소설 첫 문장이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한다. 이 한 문장에 작가가 하고 싶은 모든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가 아닌 죽었다고 작가는 표현한다. 잘 죽었다. 죽어서 다행이다. 섭섭함보다 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하면 아버지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소설의 주인공은 고아라, 죽은 아버지는 고상욱이다. 아버지는 빨치산으로 여러 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다. 전기 고문 휴유증으로 사팔뜨기가 되었고, 아이는 낳을 수 없다는 판정을 받는다. 그런데 지인이 지어준 한약을 먹고 나이들어 딸을 하나 낳는데 그 아이가 '고아리'이다. 백아산에서 활동했던 아버지와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어머니의 근거지를 이름(아리)으로 지었다.
소설의 내용은 아버지 죽음과 장례를 치르는 과정에서 소설 속 '나'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던 아버지의 삶을 엿보게 된다. 깊은 산 같은 곳에서 조금씩 뭉쳐다니며 빠르게 공격하고 도망다니는 전투를 '유격전'이라고 하는데, '빨치산'은 유격전을 펼치는 '유격대'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한국전쟁 전후에 지리산과 태백산맥에서 활동한 '남조선 노동당 조선인민유격대'를 빨치산이라고 한다. 빨치산은 북한군의 동맹군으로 주로 남한 농민 출신이 많았다. 우스갯소리로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이들은 전쟁이 끝난 줄 모른 채 숨어서 연명하기도 했다.
고아리의 아버지는 빨치산이었고 공산주의자였고, 사회주의자였다. 하지만 평범한 시골 농부였고 구례가 삶의 터전인 평범한 남자였다. 사상과 이념을 빼면 똑같은 사람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장례를 치르면서 생생하게 보여준다. 누구보다 고향 사람의 일이라면 가장 앞장서서 도왔다. 불의를 참지 않았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의 밥벌이보다 중요한 건 민중이 잘 사는 세상이었다. 또한 수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다. 상주가 딸 하나라 빈소가 적막할 것 같았지만 모두가 나서서 아버지가 가는 마지막 자리를 지켰다.
고아리의 아버지 고상욱이 살았던 세상은 동학처럼 민중이 잘 사는 세상을 꿈꾸려면 사회주의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조금이라도 깨어있다면 그것이 정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이념 전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자유롭지 못한 세상에서 아버지의 죽음은 어쩌면 해방과 맞먹을 정도의 무게였으리라.
고아라의 작은 아버지는 아홉살 때 형이자 빨치산인 고상욱을 경찰에 말한 대가로 혹도한 시련을 겪는다. 자신의 아버지가 죽고 집이 불타버린다. 이후로 자신의 형을 평생 미워하고 살았다. 결국 장례식장에 죽어가는 자신의 몸둥아리를 끌고 형과 화해하고 죽은 자를 떠나보낸다. '고아라'도 아버지를 매장하지 않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한 줌 재로 남은 사나이를 구례 곳곳에 뿌린다.
"아버지 뜻이 그랬으니 뜻대로 해드리고 싶어요."
"느그 아베는 살아서도 혈육 등지고 동무를 찾아가등만 죽어서도 동무들이 먼첨이라냐!"
아버지가 가족을 등지고 사회주의에 몸담았을 때,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혈육을 뿌리치고 빨치산이 되었을 때, 이런 마음이겠구나. 첫걸음은 무거웠겠고, 산이 깊어질수록 걸음이 가벼웠겠구나. 아버지는 진짜 냉정한 합리주의자구나. 나는 처음으로 나와 같은 결을 가진 아버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소설 속의 아버지는 형편이 안 좋은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또한 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늘 "오죽하면 그랬겠냐!"라는 말을 달고 산다. <뭐라도 남기리>에서 김남길과 이상윤이 어른이 뭐냐고 물었다. 그때 정지아 작가도 소설 속 아버지처럼 말한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경험과 시간이 쌓여서 '오죽하면 그러겠냐'라고 말할 수 있는 것, 작가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라고 한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사램이 오죽하면 글겄냐.'는 작가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고 한다. 소설 속의 고아라 아버지 고상석도 이 말을 달고 산다. 작가는 그 말을 받아들이고 보니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다. 진작 아버지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그런다. 책에서도 작가는 딸을 대장부의 몸으로 낳아주신 것도, 하의 상의 인물로 낳아주신 것도 다 이해할 터이니 그간의 오만을, 무례를, 어리석음을 너그러이 용서해달라고, 감사하다고 전한다.
<뭐라도 남기리>에서도 작가는 자신의 인물평을 하면서 '하의 상'이라고 해서 엄청 웃었다. 인물이 뭐가 그리 중한가? 아버지의 삶을 온전히 이해한 딸은 '상의 상'이 아닌가?
빨치산이라는 이유로,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죽을 때까지 고초를 당했던 사람들. 얼마나 고난의 세월을 살았을지 가늠도 못 하겠다. 게다가 연좌제에 묶여 자기 삶의 방향을 잃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그 역시도 얼마나 아팠을지 상상도 할 수도 없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읽고 인제야 어깨에 얹혀 있던 돌덩이 하나가 사라진 기분이다. 아직도 우리는 이념 앞에 망설이는 세상을 살고 있다. 언제쯤이면 이런 걱정 없이 웃을 수 있을까?
'평론 서평 글쓰기 요령'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울지 않는 새는 없다 (0) | 2024.10.30 |
---|---|
진솔한 삶의 기록, 연륜의 힘 (0) | 2022.11.10 |
고전古典의 숲을 거닐다 (2) | 2022.11.10 |
개인적 체험이 민족의 역사로 승화 (1) | 2022.10.30 |
한복용 서평 '무진으로 가는 길' (0) | 2022.04.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