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다시 읽고 싶은 수필

죽음 앞에서 / 정승윤

by 안규수 2023. 12. 9.

 

                                                                          죽음 앞에서 / 정승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초원에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들의 갈기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그들의 구리빛 동체는 늠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 마저 잊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신화 속의 동물들처럼 보였다. 거기에 비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초라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우산을 펴야 했고 또 우비를 입어야 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해안에서는 우산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곧 우산을 접고 우비만으로 버텨야 했다. 바다 쪽을 보니 높아진 파도가 바위들을 거칠게 때리고 있었다. 하얀 머리의 짐승들이 미친 듯이 포효하며 해안을 물어뜯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낮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는 이미 죽음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처럼 어두워 보였다.

며칠 전에 죽음의 목전까지 다다른 적이 있었다. 발이 미끄러져 키가 넘는 물웅덩이에 빠져 버린 것이다. 너무 당황하여서 헤엄도 잘 쳐지지가 않았다. 건너편의 바위까지가 아득한 거리처럼 여겨졌다. 바위에 매달렸을 때 이미 거의 탈진한 상태였다. 마지막 사력을 다해 바위 위로 기어올라 왔지만 한참을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가 없었다. 어떻게 보면 불과 일이 분의 짧은 순간에 생과 사를 오간 것이다. 그 순간에 머릿속을 스쳐간 생각들은 뻔한 것이었다. 이러다 죽지 않을까? 아, 이렇게 죽는 모양이구나.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죽음인가! 또 얼마나 지리멸렬한 삶이었던가! 나는 한참을 바위 위에 엎드려 있었고 머릿속에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들의 반응이 어떠할지 명확하진 않았지만 소수의 가족을 제외하곤 내 죽음이란 누구에게도 중요한 문제가 아닐 거라는 생각은 들었다. 내 존재란 얼마나 가벼운 것이었나. 나의 인간관계란 얼마나 엉망진창이었었나. 살면서는 멸시라도 당했지만 죽고나면 그들은 멸시했다는 그 기억마저도 곧 잊고 말리라.

오, 죽음처럼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여! 그 죽음에 맞서는 바위들이여! 굴하지 말라. 고개를 똑바로 세워라. 고개를 꺾지 마라. 바다는 나약한 죽음의 현장만은 아니다. 어떻게든 살아있는 것이 아름다운 법이다. 삶과 죽음은 신이 관장하겠지만 살려고 하는 의지는 인간만의 것이다. 항상 신에게 기도했지만, 정작 죽음 앞에선 신은 침묵하신다. 오로지 인간의 의지를 통하여 말씀하실 뿐이다. 죽음의 바다를 똑바로 응시하라!

긴 돌담길이 비에 젖고 있었다. 돌들의 표정이 재미있었다. 웃고 있는 놈, 울고 있는 놈. 바보같은 놈, 표독스런 놈. 둥그런 놈, 강퍅한 놈. 그래도 모두들 어깨를 겯고 있었다. 흩어지지 않으려는 듯 잔뜩 밀집해 있었다. 어리석은 나만이 홀로 걷는다. 인간을 못 견뎌한 외로운 한 인간이 비를 맞으며 걷고 있다. 나는 스스로에게 자문한다. 죽음도 홀로 맞을 수 있겠느냐? 죽음의 강을 홀로 건널 수 있겠느냐? 돌들이 저렇게 서로의 무게와 서로의 고통을 견디고 있는 것은 오로지 죽음 때문이다. 외롭게 죽지 않기 위해서다. 서로의 죽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서로를 통해서만 들리는 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다. 나는 비에 젖은 초라한 몰골로, 돌처럼 거칠고 모진 사람들을 향하여 천천히 손을 뻗고 있었다. 

 

 

'다시 읽고 싶은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치매 / 정승윤  (0) 2023.12.09
집 / 정승윤  (1) 2023.12.09
기쁨이 / 정승윤  (0) 2023.12.09
만월 / 정승윤  (1) 2023.12.09
낮은 구름 / 정승윤  (0) 2023.1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