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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

집 / 정승윤

by 안규수 2023. 12. 9.

 

                                                                                   집 / 정승윤

허공에 내 집 한 채 지으리라. 들판에 만연한 들불에도 불붙지 않는 내 집 한 채 지으리라. 불붙어 다 타버리고도 남아 있을 집 한 채 지으리라. 아무나 드나들 수 있고 아무나 부술 수 있어도 나만이 등 뒤로 닫을 수 있는 그런 문짝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대기권을 벗어나지도 않고 지상에 속하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디 쯤에 내 집을 지으리라. 바람과 구름 그 어디쯤에 집 한 채 지으리라.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도, 세상의 물이 다 범람해도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나 혼자 춤추며 나 혼자 눈물 흘리는 그런 고요한 식탁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세상의 노염에 불붙지 않고 세상의 질투에 무너지지 않는, 이 세상에 없는, 이 세상의 집 한 채 지으리라. 오직 그대만을 위해 지었으나 그대는 살지 않고 나만이 살고 있는 그런 집 한 채 지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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