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간 밤에도 평안한 쉼의 시간을 보내셨는지요?
오늘도 새 날, 새 힘, 새 힘, 새 소망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저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오늘 하루 저를 통해 누구를 사랑해 주길 원하십니까?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가득한 하루되시길 기도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축복합니다. ^0^
1984년 남편이 군목 훈련 중 부상을 당하고 회심하였고,
부상 때문에 귀가 조치되어 목발을 짚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듬해인 1985년 4월, 남편은 몸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니
신체검사만 받고 돌아올 것이라고 하고 갔는데, 소식이 끊겼습니다.
지금처럼 군대에서 연락할 수 있는 때가 아니기에
땅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일주일 후, 몸이 성치 않아 훈련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일주일 후, 몸이 성치 않아 훈련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서 입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걱정으로 몇 밤을 뜬눈으로 새운 일주일 동안 저는 제 믿음의 현주소를 보았습니다.
가장 가까운 부부임에도 남편의 회심이 곧 저의 회심은 아니었고,
저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누구나 위기의 때에 자기에게 익숙한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돈이 익숙한 사람은 돈을 찾고, 사람이 익숙한 사람은 사람을 찾습니다.
누구나 위기의 때에 자기에게 익숙한 것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돈이 익숙한 사람은 돈을 찾고, 사람이 익숙한 사람은 사람을 찾습니다.
위기에 부딪히고 보니 기도는 익숙한 저의 환경이었을 뿐,
실제로 제게 익숙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걱정과 두려움’이었습니다.
어머니 기도에 얹혀살다가, 남편의 기도에 얹혀사는 껍데기였습니다.
그날의 충격이 저를 기도의 자리로 이끌었고,
기도의 갈망을 부어주신 주님으로 인해 지금까지 기도를 배워오고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처럼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기도를 시작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저처럼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기도를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문제만을 기도하다가 점차 다른 사람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선교지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자연스러운 과정이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이 기도의 문제는 나를 중심으로, 나와 연관된 일들로 확장되는 기도라는 점입니다.
동심원의 중심은 항상 ‘나’입니다.
기도를 이끄는 동력이 ‘나’이기 때문에 나와 관계가 없거나
나와 관계가 끊어지면 자연스럽게 기도도 힘을 잃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이 계시니 아프리카를 위해서 기도하고,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님이 계시니 아프리카를 위해서 기도하고,
내 아들이 군대에 가 있으니 나라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다가 아들이 제대하면 나라를 위한 기도도 잊어버리게 되고,
우리 교회 선교사가 없는 나라의 기도도 안 하게 됩니다.
내 문제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조차 초점이 ‘나’인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기도의 순서는 나부터 시작해서 가족, 교회, 나라, 열방으로 확대해갈 수도 있고,
내 문제를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조차 초점이 ‘나’인 것이 문제입니다.
물론 기도의 순서는 나부터 시작해서 가족, 교회, 나라, 열방으로 확대해갈 수도 있고,
혹은 열방으로부터 나라, 교회, 가족, 나 이런 순서로 수렴해갈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기도하는 순서가 아니라 기도를 이끌고 있는 중심에 무엇이 있는가입니다.
나로 인해서 시작되는 기도, 즉 동심원의 중심이 ‘내가’ 되는 기도의 문제는,
나로 인해서 시작되는 기도, 즉 동심원의 중심이 ‘내가’ 되는 기도의 문제는,
문제가 생기면 다급하게 기도하다가 문제가 없으면 느긋해지다가를 반복한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중심이 자기 자신이기에 기도하는 나의 형편과 마음이 기도를 이끄는 것이지요.
기도의 동기와 내용은 세상 사람들이 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면서
하나님께 기도한다고 합니다. 제가 그랬기 때문에 잘 압니다.
‘중보기도’와 ‘기도’가 다릅니까?
‘중보기도’와 ‘기도’가 다릅니까?
나를 위한 기도는 그냥 기도이고 남을 위한 기도는 중보기도입니까?
중보기도는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기도해도 나 중심의 지극히 이기적인 기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인 것 같고 교회를 위한 기도 같아 보여도
다 나와 연결된 문제이기 때문에 그토록 간절했던 것입니다.
세상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회와 주(主)의 일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는
교회 성장과 목회 성공을 원하는 내 안의 욕망을 보았습니다.
주님의 일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기도가
주님도 기뻐하시는 중보기도일 거라고 스스로 속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있는지를 정직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기도를 송두리째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 박리부가
† 말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 기도
주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에 감사 드립니다.
-기도를 송두리째 바꾸신 예수 그리스도, 박리부가
† 말씀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 기도
주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심에 감사 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조차 내 문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의 원함을 내 안에 부어주시고, 저의 기도를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오늘 아침 함께 나누는 따듯한 묵상>
삼상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치즈와 관련된 한 가지 실험을 했습니다.
연구진은 사람들에게 “새로 개발한 두 종류의 치즈인데 향을 표현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한 치즈는 ‘체다 치즈’라는 이름의 병에 담겨 있었고 다른 치즈는 ‘썩은 치즈’라는 이름의 병에 담겨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병에 붙은 이름을 보고 ‘체다 치즈 병에서 나온 치즈는 향이 고소하고
썩은 치즈 병에서 나온 치즈는 향이 고약하고 역겹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사실 둘 다 같은 치즈였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소믈리에들을 모아놓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러나 사실 둘 다 같은 치즈였습니다.
프랑스 최고의 소믈리에들을 모아놓고 진행한 실험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소믈리에들은 준비된 두 잔의 와인 중 ‘레드와인에서는 꽃향기와 진한 농도가 느껴지고
화이트 와인에서는 상큼함과 산뜻함이 느껴진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두 와인은 같은 화이트 와인이었고 한 와인에만 색소를 넣어 붉은색으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편견에 사로잡힐 때 본질을 놓칩니다.
아무리 전문가라도 편견에 사로잡힐 때 본질을 놓칩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고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다른 성도, 다른 이웃에 대해 평가하기 전에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어떤지를 먼저 돌아봐야 합니다.
날카로운 비판이 아닌 따스한 사랑의 시선으로 모든 사람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로 주님이 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아멘!!!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받아주신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십시오. 아멘!!!
주님, 주님을 온전히 바라보고 이웃을 주님의 시선으로 섬기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깁시다. <김장환, 나침반 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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