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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사랑이 답이다

by 안규수 2024. 3. 8.

 

        톨스토이의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문학에 입문하고 나서 수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던 책이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느냐는 의문이 들 때마다 이 소설을 떠올린다. 타인보다 우월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아서다.

  가끔은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듯한 기분이 들면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고 작아진다. 하지만 그런 감정이 나에게 필요한 거라고 말해 주는 것 같아 위로된다. 누군가로부터 오해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도 마찬가지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조금만 내려놓으면 훨씬 편해진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게 바로 진짜 사랑인걸.

 

  함박눈이 소복하게 내린 성탄절 새벽 안타까운 화재 소식이 전해졌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 고층 아파트 3층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해 30명이 다치고 30대 남성 두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사람은 네 식구의 가장인 박모 씨(33)로 생후 7개월인 둘째 딸을 안고 4층 집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딸은 살리고 본인은 숨졌다. 다른 한 사람은 10층에 살던 임모 씨(38)인데 70대 부모와 남동생을 먼저 대피시킨 뒤 맨 마지막에 탈출하다 11층 계단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다.

숨진 박 씨는 단지 내 작은 아파트에 살다 둘째가 태어나고 집을 넓혀 이사 온 지 6개월 만에 참변을 당했다. 박 씨는 아이 받아주세요라고 외치며 두 돌배기 첫째 딸을 경비원이 대피용으로 깔아놓은 재활용 종이 포대 더미 위로 던져 살리고 둘째를 안고 뛰어내렸다. 뒤따라 뛰어내린 부인은 어깨 골절상을 입었다. 박 씨는 품에 안은 젖먹이를 위해 추락의 충격을 온몸으로 받아내다 숨진 것으로 보인다. ‘호미(아버지)도 날이지만 낫(어머니)같이 들 리 없다라는 고려가요 사모곡가사가 무색한 부성애다.

  또 다른 희생자인 임 씨는 자식의 부모 사랑도 부모의 자식 사랑 못지않음을 보여주었다. 불이 나자 119에 최초로 신고한 후 부모와 남동생을 깨워 먼저 대피시키다 독한 연기를 마시고 쓰러졌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자랑스러운 아들, 월급 받으면 맛집에 모셔가고 계절마다 새 옷을 사주던 살뜰한 아들이 깨어나지 않자 늙은 부모는 오열했다.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 네가 죽으면 어떻게 하니. 이제 우린 어찌 살라고.”

 

  매일 좋은 책이 무수히 쏟아지는 시대에도 고전은 투박하지만 단단하게 뿌리 내린 산맥 같은 힘이 있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의 마음속에는 사랑이 있다.’ 사람에겐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가를 예측하는 힘을 주지 않았다면서, ‘그럼에도 사람은 역시 사랑으로 산다라고 설파했다. 어린아이들을 살리고 간 박씨,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을 살려내고 쓰러진 임씨, 이 두 젊은 남자가 치명적 화마를 막아낸 건 가슴 먹먹한 가족애다. 이제 해마다 성탄절이 돌아와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살아남은 이들에게 슬픔의 성탄절이 아닌, 뜨거운 불길 속에서 목숨 걸 만큼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 주고 떠난 아버지와 남편, 아들과 형은 톨스토이 말한 마음속에 잠재된 그 사랑의 발현이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나 찻집에서 지나간 이야기들로 잡담을 나누었다. 먼저 간 친구들, 치매로 요양원에 입원한 친구들 이야기였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돌아오는 저녁 길. 건널목 앞에 이르는 순간 바뀌는 신호등 앞에서 잠시 기다린다.

눈이 내린다. 도로변에 눈이 쌓인다. 눈이 내려도 눈을 볼 수 없는 이곳 남도에서 이 눈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유난히 추운 겨울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내일이 입춘이니 마지막 겨울에 작별 인사를 건네는 마음으로 눈을 바라본다. 눈 위에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이 나 있다. 누가 남겨놓은 발자국일까? 초등학교 시절 책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 동무들과 눈싸움하고 눈사람 만들던 그 소년의 발자국일까?

  드디어 신호가 바뀌고 질주하던 차들이 멈춘다. 그 어린 소년의 발자국 옆에 내 발자국을 남기고 서둘러 길을 건넌다.

 

  한 해를 돌아다보면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데 시간은 벌써 저만치서 꼬리를 감추고 있다. 11월은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니다. 늦가을과 초겨울이 만나는 그 언저리 어디쯤이다, 비가 오다가도 눈이 되기도 하고, 눈이 다시 비로 변하는 달 들국화도 쑥부쟁이며 구절초도 이달에는 모두 빛을 잃는다. 떠나는 게 어디 그들만이겠는가. 모든 게 침묵한다. 벌레 소리도 나뭇잎도 친구들도 침묵한다. 친구 중 누군가 겨울이 되면 먼 길 떠났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내 마음도 침묵한다.

  이제야말로 나이를 먹으며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을 이웃에게 베푸는 일이다. 따뜻한 눈으로 힘을 보태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에게 다가가고 싶다. 아직도, 사랑할 사람이 주변에 넘쳐서 다행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나에게는 사랑할 시간이 무한정 남아 있진 않다.

  그냥 잠들기에는 아직은 이른 시간, 가볍게 떠나는 모든 것들에 목례를 보내고 어두운 방에 불을 밝힌다. 그리고 가만히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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