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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손 편지

by 안규수 2025. 8. 30.

     

                                                                  손 편지

                                                                                                           안 규수

 

 

      지난해, 나는 뜻밖에 손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학창 시절 이후 처음 받은 편지였다. 하얀 종이봉투가 내 손에 닿았을 때, 나는 한동안 뜯지 못한 채 바라만 보았다. 그 순간의 감정은 따스한 겨울밤, 갓 구운 고구마를 손에 쥔 듯한 포근함이었다. 그 안에는 지난해 말 발간한 동인지에 실은 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내용이 펜으로 또박또박 쓰여 있었다. 그는 문학 동호인으로 시를 쓰는 여류 시인이다.

    지금껏 두 권의 수필 선집을 펴내며, 책을 받은 독자들로부터 전화와 메일로 축하 인사를 받은 적은 있었다. 그러나 손 편지를 받은 것은 학창 시절 이후 처음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기에 그 편지는 내게 낯설면서도 묘한 감흥으로 다가왔다. 종이에 펜으로 꾹꾹 눌러쓴 글씨 속에는 그의 숨결과 온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문득, 고등학교 시절 옆 반 여학생과 펜팔을 주고받았던 가슴 뭉클한 사연이 생각났다. 그녀의 편지는 독서를 많이 한 탓인지 문장이 유려하고 매끄러웠다. 그에 비해 내 글은 늘 빈약하고 서툴러, 편지를 쓸 때마다 부끄러움이 앞서곤 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고심하던 중 형의 책꽂이에 톨스토이 단편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비롯해 이름조차 생소한 여러 권의 소설책이 가지런히 꽂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호기심에서 그 책들을 꺼내 들고 읽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연 듯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활자를 읽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낯선 인물과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 독서의 기쁨은 삶을 새롭게 열어젖히는 경이로운 체험이란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책을 읽고 난 뒤 그 여운은 오래도록 내 곁을 맴돌았다, 나도 글을 쓰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헌책방에서 구해 읽은 <고추장의 작은 단지를 보내며, 열하일기, 일야구도하기 (一夜九渡河記) > 등 연암의 책은 나에게 새로운 배움을 안겨주었다. 신변잡기의 울타리를 벗어나 이야기 중심의 글쓰기에 눈을 뜨게 되었고, 매끄럽고 유연한 문장의 흐름을 익히는 계기가 되었다. 연암의 글은 마치 벗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은 문체가 묵힌 발효의 향처럼 깊고 유연하여, 내 글 또한 그 향기를 머금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일었다. 나의 글쓰기는 나만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김승옥 문학연구회에서 올해의 과제로 선생님의 작품무진기행을 원고지에 필사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원고지에 글을 쓸 일이 없었던 나는, 6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손 글씨를 써 본다. 아련한 기억이 돌아온다. 지렁이 지나간 글씨, 추웠던 겨울의 문풍지 소리를 들으며 밤새 머리를 싸매고 연애편지를 쓰다 종이를 발기발기 찢어 쓰레기통에 던지던 소리, 한밤 찹쌀떡! 소리가 들리면 어둠만 있던 자취방의 외로움 소록소록 묻어난다.

    이런저런 먼 이야기들이, 각기 다른 모양을 지닌 글씨로 원고지 위에 내려앉을 때마다 나는 마치 콩나물시루 속에서 돋아나는 여린 싹처럼 바라보곤 했다. 그 필적이 모여 원고지를 가득 메워 갈 때, 나는 거기서 알 수 없는 기쁨과 묘한 매력을 느꼈다. 원고지를 채워가던 일은 나의 글쓰기를 위한 가장 은밀한 연습이자, 배움의 시간이었다. 작가의 문장을 따라 쓰며, 느낀 쏠쏠한 재미와 깨달음은,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서 잔잔한 파문으로 남아 있다. 작품을 읽고 그 문장을 따라 쓰는 일은 단순한 흉내 내기가 아니었다. 손끝으로 더듬 듯 베껴 쓰는 순간, 나는 어렴풋이 작가의 내면에 닿는 듯했다. 문장 속에 숨어 있는 숨결, 한 줄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오래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마침표를 찍었을지 짐작하는 일은 나에게 작은 설렘이었다. 베껴 쓰면서 나는 작가의 기쁨과 슬픔, 망설임과 고독을 함께 맛보았다.

 

    한때 나를 감싸던 달빛과 별빛은 서서히 사라지고, 오래도록 마음을 채워주던 추억의 그림자들마저 하나둘 흩어져간다. 아름다운 걸 아름다움으로 느끼고 받아드릴, 나의 따스한 온정이 묻은 순수한 손 편지를 보낼 벗들이 하나둘 먼 길을 떠나니 안타까울 뿐이다.

거기에 젊은 날 나를 위로해 주던 단어들이 하나둘 멀어져 간다. 믿고 의지하던 언어들은 어느새 쭉정이가 되어 바람에 흩날리고, 내가 부릴 수 있는 단어들은 이제 고작 한 줌 남아 있을 뿐이다. 나는 이 언어의 빈곤을 슬퍼하지 않는다. 가난하면 가난하게 글을 쓰면 된다.

    경험은 하나의 점()으로 남는다. 그 점들이 흩어질 때 비로소 선()이 되고, 그 선이 모여 이야기가 되었다. 글을 쓴다는 건 지난날의 고통과 눈물을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다시 만지고, 오래된 기억의 빗장을 열어젖히는 일이다. 그 아픔을 치유하는 일은 따끈한 손 편지 한 통이 아닐까 싶다.

 

    여생에 다시 또 따끈한 손 편지를 받아볼 수 있을까. 이승의 고단한 삶 끝에 가을 단풍처럼 붉게 물든 나의 인생, 그저 손때 묻은 손 편지 한 통만 내게 온다면 더는 여한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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