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수필작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신춘에 출품되었다면 이 작품을 뽑지 않는 심사는 잘 못 된 것이다. 완벽한 수필의 구조를 갖췄다. 습작의 작가라면 그만큼 배울 게 많다. 당신이 백일장에 나갔다. 주어진 제목이 기차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철둑길 가까이에 있었다. 여름 밤 심심해서, 아니 꼭 여름만은 아니었으니까 빼고, “저녁밥을 먹은 뒤 심심해서 강둑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부터 기차가 어둠을 뚫고, 그러면 표현이 너무 밋밋하지. “기차는 언제나 어두운 들녘의 한 쪽을 들치고 씩씩하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기적소리를 빽하고 지르면서 지나갔다. 아름다웠다. “기차는 아름다웠다. 캄캄한 밤하늘에 소리 없이 풀어지던 한 무더기의 증기도 아름다웠고, 네모난 차창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만드는 금빛 띠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들녘에 이르러 울리던 기적 소리는, 기차가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로 들렸다.”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 그러면 살았네. “나는 그때 기차가 어쩌면 한 마리의 순한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차가 지나고 나면, 마치 내 가슴을 휑하니 뚫고 자나가버리면 허전함, 나만 두고 가버렸다는 허전함이 남았다.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내 가슴속에 주르륵, 두 줄로 박아놓고 갔다.” 웬 두 줄? 철로가 두 줄이잖아. 한 발 더 나아가야지. 어머니는 날 대구에서 오는 저녁 통근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낳았고, 동생은 서울 가는 첫 기차 시각에 낳았다고 했어. 기차는 우리의 일상에 이렇게 깊게 들어와 있었던 거지. 그렇다면 농담 한 마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기起거든. 그러면 승承에선?
기차의 이미지 → 그리움. 그리움은? 과거 지향적(어느 곳에서부터 왔잖아. 그러면 돌아가고 싶겠지 → 향수)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어디론가 가잖아 → 열망). 두 가지를 동시에 품느라고 기찻길은 평행선인가?(말도 안 돼. 앞에선 두 줄을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든. 그런 식이라면 과거로 갈 땐 오른쪽 선을, 미래로 갈 땐 왼쪽 선을 달려야지. 그런데 기차가 왜 과거로 가? 항상 앞으로만 가니 미래로만 가는 게 아닌가?). 어쨌든 그런다 하고. 다시 돌아와서 “기찻길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이들이 그 길 끝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 미래를 향해 찾아 가는 거야. 그것은 개척의 길. → 항해 → 내 남편. 야, 내 글이라고 그렇게 쓰면 독자가 욕하지. 텝포를 늦추고 일반화시켜서 우아하게(의연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떤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기차 타기를 좋아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들어있지 않을까). 그리곤 그 위에 내 애길 살짝 얹는 거야(대학 시절 남편과 연애담).그러고 보니 승에선 모두 추상적이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것으로. 오라. 기차를 타면 대부분의 승객들이 졸아. 그들의 얼굴은 평온하더라구. 기차의자가 다 받아주기 때문이지. 오우케이, 한 건 건지고.
이젠 전轉이다. 기차와 인생의 비유. 사색적이잖아. 그러면 기차로 비춰 본 내 인생은? 주의 사항. 잘난 체하지 말고. “나는 그저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작고 이름 없는 역이라고 그냥 지나친 간이역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게다가 이것저것 잔뜩 이어 붙이는 바람에 나는 지금 너무 긴 기차가 되어 버렸다.”
결結. 여운을 남기도록. 미학적으로 끝맺기. 오후에 건널목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만났다. 겨우 다섯 량의 객실만 이은 기차였다. 기차는 은빛 햇살을 받으며 마치 나비가 날아가듯 바다 쪽을 향해 팔랑팔랑 날아갔다. 나도 그렇게 산뜻하고 경쾌한 기차가 될 수는 없을까. 기차는 오늘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결에서야 현실이 제시된다. 은빛 햇살, 나비, 바다, 팔랑팔랑, 산뜻, 경쾌. 이 단어들만으로도 기차는 바다 위로 날아갈 것 같지 않는가. 마지막 코멘트는 절창이로고.
독자들은 나의 건방진 어투 때문에 내가 이 글을 비웃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와 이 작가와의 관계가 오래 되었고, 어떤 말을 해도 그 본의를 알아줄 수 있는 친구여서 비록 평일지라도 좀 재미있었으면 하고 건방을 떤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필력을 가진 수필가를 5명 이상 알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길고 길게 작품을 설명한 이유는 내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성화, 당신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교과서 작가 아닌가. 이젠 이런 글 그만 쓰자. 이 글은 완벽하다.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회고적이고, 의미심장함은 상투적이다. 현실이 표백되어진 글은 이제 그만 쓰자. 현실은 쓴다고 해서 과거를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과거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과거를 말함으로써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의 끝없는 대화’라고 했을 때 그 과거는 현실화된 과거다. 그래서 과거가 새로운 것이다.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작가가 내 친구라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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