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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지구별 여행자

by 안규수 2025. 11. 24.

                                                            지구별 여행자

                                                                                                                  안 규수

 

      벌교 천 둑에 섰던 초여름, 그 장마철의 흙탕물 냄새가 지금도 코끝을 스친다. 중학교 삼 학년, 아직 여린 손을 잡은 아버지의 침묵은 굉음을 내며 흐르던 강물 소리보다 더 무거웠다. 그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물이흘러가는구나.“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은 흐른다"라고 했던가. 아버지에게 그 강물은 고통을 씻어내고 미래로 시간을 전달하는 생명선이었다. 물이 흐르듯 고통도 흘러가 사라진다.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곧 '살아남음'의 증거이자 내일을 새롭게 시작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흐름'이 가진 생존의 동사를 이해하지 못했다. 단순히 지리학적인 현상으로만 들었을 뿐이다. 아버지가 겪어낸 한국 현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소용돌이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동족상잔의 참극이었다. 10.19 사건이 발발한 이틀 후 벌교에 진입한 반군은 소위 지역유지나 군인, 경찰 가족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소위 손가락 총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간 것이다. 유행어가 된 손가락 총이 한마디는 오랫동안 죽음의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녔다.

 

   조정래 작가, 벌교와의 인연은 대하소설태백산맥에서 스크린처럼 펼쳐진다. 선암사 조실에서 태어난 그가 기록한 한국 현대사의 아픔을 그린 소설 마지막 부분에서 염상진이 수류탄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살아남은 하대치와 대원들은 그의 묘소에 참배한 뒤 다시 길을 떠난다.

   비극적 종말과 새로운 시작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내 삶의 궤적과 겹친다. 한 시대의 슬픔이 끝나도, 개인의 삶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이 곧 '인생'이라는 이름의 로드무비가 아닐까. 젊은 날에는 산 아래에서는 봉우리를 갈망했고, 산 위에서는 평온을 그리워했다. '끝없는 전진'만이 유일한 삶의 미덕이라 믿었던 시절이었다.

   이제는 지리산 노고단을 멀리 바라보며 천은사 둘레길을 걷는다. 웅장한 높은 산을 굳이 정복하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바라봄으로 족하다. 삶의 목표가 '소유와 정복'에서 '관조와 인정'으로 '국면 전환'을 한 것이다.

   이러한 관조의 철학은 동양 산수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양의 원근법을 거부하고, 먼 산과 가까운 산, 그 사이의 안개를 하나의 화폭에 겹쳐 놓는다. 시선이 스며들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와 기운, '여백'을 담아낸다. 그 무한한 강산 속에서 인간은 한 점에 불과하다. 벼슬이 높은 자가 아닌, 지게 진 농부이거나 삿갓 쓴 가난한 선비. 그들이 풍경의 주인이 나이라, 조화롭게 함께 사는 일부일 뿐이다.

   장자의 호접몽(蝴蝶夢) 은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바람 같은 이야기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비였는지, 내일의 나비가 지금의 나를 꿈꾸는지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삶은 짧고 덧없다. 모든 것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공()의 감정이 문득 스칠 때, 길버트 K. 체스터턴의 명쾌한 문장이 나를 일깨운다.

 

   "인생의 많은 문제는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I am).“

 

   모든 문제 즉 자존심, 오만, 편견, 두려움, 욕망, 아집이런 것들이 삶을 어지럽히는 근본 원인이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은 지난해 큰 수술을 받고 퇴원 후 숲길을 걸으며 깨달았다. 두 다리로 스스로 걷는 일의 위대함이 바로 ''라는 존재의 복이었다. 요즘 기억은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입안에서만 맴도는 단어, 소리 없이 찾아온 노화가 마음을 쓸게 한다. 이는 육체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늙는다는 애달픈 서러움이다.

   이제 나는 지구별의 여행자다. 나이 들수록 반복되는 일상은 의무가 아니라 은혜에 가깝다. 비자 기한이 정해진 손님처럼 이 초록별을 잠시 가로지르는 중이다. 반복 속에 숨어 있는 고요한 질서가 내 삶을 다시 세우고, 다시 걷게 한다.

   사랑하는 가족과 기쁨을 공유하고, 향기로운 음식을 천천히 음미하고, 주어지는 하루를 기쁘게 살아내는 것. 삶이 멜로디라면, 사랑은 그 멜로디를 흔드는 리듬이다. 비록 지금은 깊은 겨울이라 해도, 수양버들 가지는 이미 따뜻한 봄이 품고 있다.

   힘겨운 하루를 살아가면서도, 마음은 여전히 젊은 날 청춘이다. 여전히 할 일이 많다. 그러니, 내 삶은 계속될 것이다. 흐르는 물처럼, 끊임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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