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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상처로 빚은 글 꽃

by 안규수 2025. 12. 10.

                                                                상처로 빚은 글 꽃

                                                                                                                     안 규수

 

 

      생은 반복의 연속이다. 도돌이표처럼 거듭되는 일상을,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을 부단히 되풀이하면서 세월 속에서 헤맨다. 글쓰기는 인생과 닮았다.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견딜 때 글과 삶은 깊어지고 단단해진다. 마음은 한없이 원초적이고 예민하다. 거기에는 삶의 희로애락이 촘촘히 각인된다. 밝은 무늬만 새겨질 리 없다. 슬픔과 좌절처럼 어두운 문양까지 고르게 새겨진다. 삶을 온전히 글로 옮기려면, 마음에 울려 퍼지는 희망과 환희뿐 아니라 울음과 함께 터져 나오는 통곡과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의 미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 살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산책길, 매화나무 묵은 가지 사이로 피어오른 꽃향기가 코끝을 스칠 때 잠시 멈춰 선다. “매화가 피면 편지를 쓰고, 목련이 피면 또 다른 편지를 쓰던 때가 있었지.” 다정한 옛 시절이 바람결에 흩어져 들려오는 듯하다. 세월은 강이었다. 잔물결 같은 희비가 흔들리다가도, 어느 골짜기에서는 폭포처럼 삶을 추락시키며 강하게 갈아 세웠다. 그 강물에 오래 휩쓸렸고, 살아남은 조약돌처럼 둥글게 닳아갔다. 아름다운 시절은 짧았고, 견딜 수 없어 보이던 계절은 길었다. 그럼에도 기어이 떠밀리지 않고, 겨울 들풀처럼 바람 아래에서 뿌리를 좇아 내려가며 버텨냈다. 그 뿌리가 내 글의 밑바닥이 되었다.

   돌이켜보면, 생은 들꽃보다 향기롭지 않았고, 들풀보다 질기게 살아남아 지금 여기까지 와 있다. 들풀의 질김은 땅속의 보이지 않는 상처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풍경은 아직도 아득하다. 첩첩산중, 가난이라는 돌담 사이에서 바위틈 소나무처럼 외롭게 자라던 소년.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 자라서인지, 웃음보다 침묵이 더 익숙했다.

   

   해방 직후 10.19 사건으로 작은누나와 매형을 잃은 날, 집 안의 공기는 설명할 수 없는 무게로 내려앉았다. 그날의 정적은 평생 귀에서 사라지지 않는 금속성의 울림이 되었다. 부모님은 한 마디의 원망도 없이 그 절망을 견뎠다. 어둠을 품은 채 묵묵히 일상을 이어갔고, 그 침묵의 강에서 문학의 가장 단단한 뿌리를 발견했다. 상처는 글의 결을 만들었고, 그 결은 아무리 닳아도 지워지지 않는 고유한 무늬가 되었다.

   30대에는 줄 위의 광대였다. 작은 항구도시의 그늘 속에서 위태로움을 발끝에 얹은 채 하루하루를 건넜다. 불안은 매일 뒤꿈치를 물어뜯었고, 무력감은 그림자처럼 달라붙었다. 줄타기는 버티는 힘이 되었다. 언젠가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공중에서 잠시 떠 있는 순간을 비춘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한순간의 허공이 기록을 만든다.” 그 말이 괜히 심장을 쳤다. 정말로 인생이 허공에서 흔들리는 시간을 견디는 일 같았다. 그 허공에서 어쩌면 조금씩 본연의 모습을 건져 올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의 가장 조용한 빛은 뜻밖에도 퇴직 이후에 찾아왔다. 순천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온 꿈이 이루어지듯 찾아왔다. 4년 동안 시를 공부하고, 소설과 산문에 온 정성을 쏟아부었다. 산문은 가장 낮은 문, 가장 넓은 숨. 그 문턱에서 비로소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제주 돌문화공원의 어머니 방에서 한 점의 수석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아들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엄마 품에 안겨 꾸중을 듣고 있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묵묵한 돌의 결 사이로 외로움이 비집고, 어느 각도에서는 고단했던 엄마의 얼굴, 철없는 소년의 얼굴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엄마.”

    오랫동안 잊힌 말이 돌 앞에서 비로소 터져 나왔다. 짙은 어둠이 깔린 새벽녘 홀로 서재에 앉아 그 돌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글을 썼다. 글을 쓰는 동안 가슴 속에 쌓인 상처가 눈물에 녹아 흘러내렸고, 비로소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서 글쓰기는 기록이 아니라 치유이며, 상처를 꺼내 자기 손으로 만져봐야 비로소 본연의 얼굴이 드러난다는 사실을 그날 이후 알았다.

   깊은 산 응달에서 외롭게 핀 풀꽃에도 우주는 고요히 숨을 불어넣지 않는가. 글도 그러하다. 낡은 생각을 비우고, 굳어버린 시선을 허무는 지난한 과정. 글을 바꾸려면 생각을 바꿔야 하고, 생각을 바꾸려면 결국 삶을 뒤집어 봐야 한다. 허물을 벗지 못한 뱀은 죽는다. 인간도 똑같다. 변화하지 않으면 썩는다. 안의 오래된 껍질들이 굳어갈 때마다 글로써 그것을 벗기려 애썼다.

 

    인생은 원래 길 없는 땅을 걸어가는 여행이다. 걸어온 뒤에야 비로소 길이 생기고, 그 길이 존재를 증명한다. 글과 길과 삶은 서로의 그림자이자 빛이다. 한쪽이 흔들리면 다른 쪽도 흔들리지만, 결국은 서로를 비추며 하나로 이어진다. 이제 닫혔던 자아의 문을 천천히 연다. 바람이 부는 대로 길이 생기고, 그 길 위에 풀잎 하나라도 흔들리면 그것이 곧 문장이 된다. 초원을 떠도는 유목민처럼 살아 있는 자연의 숨결을 받아 글을 쓴다.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그래서 요즘의 글쓰기는 기도에 가깝다. 고통의 세월조차 글이라는 어망(漁網) 속에서 걸러져 향기로 남기를 바란다. 강물 위에서 햇빛에 반짝이며 흔들리던 물결처럼, 고통도 언젠가 아름다움으로 변할 수 있다고 믿고 싶다. 문학은 봄날의 북풍을 견디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나무였다. 세상의 모든 꽃은 자신을 찢는 고통을 통해서만 피어난다. 그 아픔과 깨달음으로 빚은 한 송이 글 꽃을, 지금 이 맑은 세상 앞에 조용히 내밀고 싶다. 아마 이것이 생이 마지막까지 쓰는 가장 개인적이면서도 가장 우주적인 문장이 될 것이다.

    한 송이 글 꽃, 상처로부터 피어난 영혼의 작은 증거를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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