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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

나를 일으키는 침묵

by 안규수 2025. 12. 27.

                                                   

                                                          나를 일으키는 침묵

                                                                                                      안 규수

 

 

    상은 종종 울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로 가득하다. 슬픔을 마음 놓고 드러내는 일은 곁에 있는 이들에게 나약함으로 비치기 쉽기에, 사람들은 저마다의 가면을 쓰고 일상을 버텨낸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해 억지로 삼켜낸 감정들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고요히 잠긴다. 하지만 슬픔은 마주하여 밖으로 내어놓지 않으면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면의 수조를 더 깊고 무겁게 채울 뿐이다.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감정은 안으로 굽어들어 영혼의 벽을 갉아먹는다.

   지난해 대학병원에서 수술은 삶의 궤적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차가운 수술대 위에서 마주했던 생의 유한함, 퇴원 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은 일상을 잿빛으로 물들였다. 위로가 절실한 날들이 이어졌다.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음악은 가장 빠르게 내면을 장악하는 처방전이 된다. 밝고 경쾌한 리듬은 잠시 일상의 무게를 잊게 하지만, 정작 영혼의 깊은 곳을 정화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낮고 슬픈 선율이었다. 때로는 억눌렸던 눈물이 터져 나와야 엉킨 마음의 실타래가 풀리듯, 슬픈 음악은 역설적으로 다시 일어설 치유의 동력이 되어주었다.

   정호승 시인은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라고 노래했다. 슬픔 또한 삶을 지탱하는 고귀한 감정임을 깨닫는 순간, 길 위에서 길을 잃었던 영혼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쉰다.’ 슬픔은 극복해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온전히 껴안고 가야 할 삶의 동반자임을 나직이 속삭여 주었다.

   지난 8, 한여름의 지독한 열기를 피해 제주로 향했다. 바다를 건너 공항에 발을 내딛는 순간, 공기의 결부터 육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섬 특유의 야생적인 온기와 짭조름한 바다의 생기가 피부에 닿았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그 공기는 지친 육신을 말없이 반겨주었다. 섬에서의 '여행'은 단순히 물리적인 장소를 옮기는 행위가 아니었다. 걷고 멈추는 모든 순간, 의식의 수면 아래 숨어 있던 기억들과 상처받은 자아를 하나둘 깨워 마주하는 수행의 과정이었다.

   영실로 향하는 길, 한라산의 품은 여름의 열기가 무색할 만큼 서늘하고 청량했다. 우직하게 자리를 지킨 소나무 숲길을 지나 병풍바위에 오르니 설문대할망의 전설이 바람에 실려 오는 듯했다. 그것은 박제된 옛이야기가 아니라, 척박한 섬의 환경을 버텨온 사람들의 숨결이 돌 속에 스며든 생생한 기록이었다. 거센 바람과 집어삼킬 듯한 파도를 견디며 삶을 일구어온 제주 사람들의 고단한 세월이 발치에 차이는 돌멩이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었다. 억척스러운 생명력 앞에서 개인의 고통은 작고 미미한 것으로 치환되었다.윗세오름을 지나 남벽 앞에 서자, 구름이 수줍은 아이처럼 암벽을 가렸다 드러내기를 반복했다. 신이 잠시 허락한 풍경을 엿보는 듯한 장엄함이 눈 앞에 펼쳐졌다. 풍경은 길게 머물러주지 않았고, 인간의 세월 또한 그러할 것이다. 언젠가 다시 이 자리에 설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기에, 지금, 이 순간의 풍경은 더욱 간절하게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찰나의 미학은 영원보다 깊은 각인을 남겼다.

   이어지는 사흘은 절물휴양림의 품에 안겨 온전히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는 시간이었다. 하늘을 찌를 듯 곧게 솟은 삼나무들이 뿜어내는 은은한 피톤치드 향기 속으로 빠져들었다. 나무 아래 놓인 평상에 누워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을 펼쳤다. ‘거짓으로부터 멀어질 것,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 삶의 본질을 끊임없이 물을 것.’ 숲의 깊은 침묵은 그 명징한 문장들이 마음 바닥에 천천히 가라앉아 뿌리 내리도록 돕는 커다란 물그릇이 되어주었다.

   해가 저물 무렵, 긴 그림자를 드리운 숲길을 걸었다. 조시 그로반의 ‘You Raise Me Up’이 귓가에 감미롭게 흐르고 있었다.

 

   "당신이 날 일으켜 세울 때

   나는 무너져도 다시 일어선다.

   험한 산도, 거친 바다도

   그 순간이 두렵지 않다."

 

   그 선율은 숲길에서 절망을 통과해 희망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었다. 삶의 무거운 짐들이 그 멜로디 속에서 한 줌 바람처럼 가벼워지는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대자연의 거대한 침묵과 음악의 선율이 무너진 내면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었다.

   숲은 단순히 나무가 모여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삼나무 사이로 부서져 내리는 햇살의 파편들은 어두웠던 내면의 구석구석을 비추었고, 바스락거리는 잎새의 소리는 그 어떤 정교한 위로의 말보다 따뜻했다. 고독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었다. 비로소 전체와 연결되는 충만함을 느꼈다.

   모든 여행의 끝은 결국 집으로 돌아온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제주 길 위에서 마주했던 풍경들이 거실의 공기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여행이 끝난 자리에 남는 건 여정의 피로가 아니라, 자신을 바라보는 확장된 시선이다. 이전과는 다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전과는 다른 호흡으로 일상을 대하게 되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삶은 수없이 떠나고 돌아오는 길 위의 반복이다. 그 길에서 바람처럼 흘러가고 별빛처럼 스며들며 오늘의 좌표에 이르렀다. 한여름 소나기처럼 급작스럽게 찾아왔던 몸의 고통과 죽음의 공포는 숲의 침묵 속에서 조금씩 치유된 듯싶다. 숲은 상처를 어루만지는 가장 자비로운 명의(名醫)였다. 나무의 호흡과 바람의 흐름이, 그 속에 머물렀던 침묵의 시간이 병든 몸과 영혼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이제 다시 시작될 일상에서 숲에서 얻은 그 고요한 힘으로 다시금 한 발을 내디딜 용기를 얻는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장 격렬한 생의 외침임을 비로소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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