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숲
안 규수
바람이 스치기만 해도 대나무는 은빛 비늘을 파르르 떨며 물결을 일으켰고, 줄기 사이로 쏟아진 햇살은 투명한 빛의 계단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어린 시절의 그는 그 숲에서 숨바꼭질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바람과 햇빛, 새소리와 흙 내음이 어우러진 대숲은 어린 그에게 세상의 생명들이 한 호흡 안에서 서로를 어떻게 지탱하고 기대어 사는지 가르쳐준 스승이었다. 그때 맡았던 빛의 냄새와 잎들의 속삭임은 팔순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그의 안에서 끊임없이 되살아나 마음의 결을 흔들곤 했다.
숲처럼 고요하고 평온하던 그의 아내가 급성폐렴으로 병원 격리병동에 누워 있다. 하루 한 번 허락된 짧은 면회 시간, 유리창 너머로 마주한 아내의 얼굴은 바람이 멎은 숲처럼 고요하고도 희미했다.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손끝을 차가운 유리에 대어 보아도 아내의 온기는 끝내 전해지지 않았다. 돌아서는 그의 등 뒤로 병동의 서늘한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따라왔다.
그가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길, 서산에 걸린 노을이 골목 어귀에 낮게 내려앉아 있었다. 한 줌 햇빛이 마음속까지 스며들려는 찰나,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끈의 무게가 그를 현실로 불러세웠다. 가방 안에는 아내에게 전달할 몇 가지 단조로운 생활용품만 들어있었지만, 그 무게는 천근만근의 바위 같았다. 그것은 병실의 메마른 공기 속에 홀로 남겨둔 아내에 대한 지독한 미안함이자, 평생 그의 삶을 지탱해 온 이의 빈자리가 주는 존재의 중력이었다.
그는 오르막을 오르다 말고 멈춰 서서 집을 바라보았다. 창 너머 새어 나오는 불빛이 허공에 매달린 외로운 수은등처럼 멀고도 낯설게 느껴졌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보일러는 여느 때처럼 힘차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사람의 온기가 닿지 않은 방 안에는 정체 모를 한기(寒氣)가 웅크리고 있었다. 아내가 병실 천장을 바라보며 고단한 숨을 몰아쉬던 모습이 눈앞에 삼삼하여, 그는 그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새벽을 맞았다.
다행히 그의 아내는 모진 고비를 넘기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투병의 흔적으로 몸은 눈에 띄게 여위었지만, 그를 향한 미소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이른 봄의 복사꽃처럼 화사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을 짓누르던 무거운 어둠이 아침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내의 귀환은 단순히 한 생명의 생존을 넘어, 그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온도를 다시 설정하는 눈부신 이정표였다.
그는 인생이라는 여정이 단 한 번뿐인 편도 여행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뼈저리게 실감했다. 되돌아갈 수 없는 그 외길 위에서 그들 부부는 서로의 그림자가 되어주었고, 때로는 굽은 길을 버티게 하는 단단한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삶의 궤적은 늘 예기치 못한 우연과 불운 속에서도 아들딸 다섯을 길러 모두 결혼하는 축복으로 뒤섞여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 험로를 결국 끝까지 함께 건너왔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들 인생의 가장 큰 경사이자 위안이었다. 요즘 들어 먼저 세상을 떠나간 친지들의 소식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나이가 되고 보니, 나란히 앉아 차 한 잔을 나눌 수 있는 이 평범한 저녁이 얼마나 경이로운 축복인지 그는 새삼 절감하는 것이었다.
그가 정년 이후, 그들 부부 서로에게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늘 붙어 지내는 시간은 오히려 서로의 시야를 가리고 과도한 부담을 지우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숨통을 틔우기 위해 도시락을 들고 시립도서관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도서관 2층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책 그늘’이라 이름지었다. 빛도 아니고 어둠도 아닌, 마음이 편안히 쉬어갈 수 있는 음영의 공간. 책장 사이로 스미는 잔 빛과 오래된 종이 냄새, 책장을 넘기는 사각거리는 소리는 어린 시절 대숲에서 느꼈던 그 심연의 고요함과 닮아 있었다.
그는 책 그늘에 앉아서 사랑을 지속시키는 힘이 ‘가까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조금 떨어져 있을 때 보이는 표정이 있고,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만 비로소 들리는 마음의 세밀한 결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에게 아내는 하나의 거대한 숲이었다. 그 숲으로 들어가면 그 안에 다른 비밀스러운 문이 숨겨져 있어 반세기를 넘게 함께 살았음에도 아내라는 숲은 여전히 깊고도 넓었다. 어떤 길은 익숙해 보여도 여전히 낯설고, 어떤 길은 처음인데도 이상하리만치 포근했다. 때로는 숲의 내민 대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했고, 길을 찾았다가도 다시 깊은 미궁에 빠지기도 한다. 숲은 길을 잃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헤맴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알게 하고, 숲길은 직선보다는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숲에는 늘 바람이 찾아온다. 바람은 가끔 거칠게 가지를 흔들어 숲을 소란스럽게 하고, 때로는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져 서늘한 적막만을 남긴다. 그럼에도 숲은 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바람이 몸통을 사정없이 뒤흔들 때, 숲은 비로소 자기만의 소리를 내며 살아있음을 온몸으로 체험하기 때문이다. 젊은 날 그들의 사랑은 바람에 가까웠다. 뜨겁고 성급했으며, 흔들리고 지나가는 매 순간이 치열했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그 격정적인 바람을 고요하고 평온한 숲으로 바꾸어 놓았다. 음영은 깊어지고 결은 섬세해졌으며, 바람이 머물 자리와 지나가야 할 길이 정갈하게 닦였다. 그렇게 오래된 숲이 된 그들의 사랑은 이제야 비로소 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바람보다 느리고 잎의 떨림보다 조용하지만, 오래 귀 기울일수록 심장 한가운데 스며드는 울림은 오히려 더 크고 묵직했다.
그는 오늘도 아내라는 숲에서 길을 묻는다. 어떤 날은 길을 잃고 헤매지만, 어떤 날은 나뭇잎 사이로 눈부시게 쏟아지는 찬란한 햇빛을 만난다. 때로는 유년의 대숲 기억이 안내자가 되어주고, 때로는 그의 아내가 무심코 던진 짧은 말 한마디가 길의 안내자가 되어준다. 그 숲에서 수없이 헤매고 비틀거리면서도 그가 가진 단 하나의 확신이 있다. 그가 평생 걸어온 고단한 모든 길은 결국 그의 아내에게 닿아 있다는 사실이다. 앞으로 그들의 남은 생의 걸음도 그러할 것이다. 그들이 걸어갈 모든 길의 끝은 다시 그 고요하고 깊은 숲으로 이어지리라는 것을, 그는 이제 조금의 의심도 없이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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