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의 신작 수필

외로운 섬의 풍경

by 안규수 2026. 2. 23.

                                                       외로운 섬의 풍경

                                                                                                           안 규수

 

   

      명절 내내 집안은 오래된 기억을 깨운 듯 활기가 넘쳤다. 부엌에서는 기름진 전 냄새가 진동하고, 거실 곳곳에는 손주들의 웃음소리가 내려앉았다. 사람 온기가 방마다 구석구석 차오르니, 비로소 사람 사는 집 같다는 실감이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명절이 끝나자, 그 온기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이들이 머물다 간 자리에는 북적거리던 말소리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 배웅을 마치고 현관문을 닫는 순간, 집은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 홀로 떠 있는 섬이 되었다. 조금 전까지 머물던 곳인데도 공기 자체가 서늘하게 변해 있었다.

   이 정적이 단순한 고요가 아님을 그때 깨달았다. 팽팽하게 연결되어 있던 시간의 끈이 툭 끊어지고, 다시 철저히 혼자가 되었다는 서글픈 기분. 외로움은 예고 없이, 아주 익숙한 발소리로 찾아왔다. 젊은 시절에는 외로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감정이며, 시간이 흐르면 파도처럼 잦아들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외로움은 전혀 다른 색깔로 다가왔다. 슬픔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운이 다해가는 상실감에 가까웠다. 아침에 눈을 뜨면 까닭 없이 몸이 무겁고, 입맛은 달아났으며, 깊은 밤에는 자꾸만 잠에서 깼다. 특별히 아픈 곳이 없는데도 몸은 물 젖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한동안은 그저 나이 탓이라 여겼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생겼다. 늙는 것은 몸보다 마음이 먼저가 아닐까. ‘나는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외로움은 단지 혼자 있어서 생기는 빈자리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혼자여도 충분히 괜찮았던 시절이 있었다. 책장을 넘기고, 서툰 글을 쓰고, 창가를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 기울이며 하루를 보내도 마음은 허전하지 않았다. 그때는 내 삶의 중심에 단단히 서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외로운 섬에 남겨진 듯한 적막은 나만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것이 아닌가?’ 하는 소외감을 남긴다.

   명절은 그 사실을 더 또렷하게 확인시켜 준다. 북적임 속에서는 여전히 가족의 일원이라는 느낌이 살아난다. 손주의 작은 손을 잡고 마당을 거닐 때면 무엇보다 행복했다. 하지만 모두가 일상으로 돌아가고 나면 그 역할마저 안개처럼 사라진다. 화려한 공연이 끝나고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홀로 남겨진 배우의 심정과 다를 바 없었다.

   지금껏 이 감정을 세상 탓으로만 돌려왔다. 가족 형태가 변하고 공동체가 무너졌다는 딱딱한 말들로 설명하려 애썼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밖에서 원인을 찾는 동안 정작 내 마음의 깊은 골짜기는 들여다보지 못했다. 외로움은 통계 수치가 아니라, 당장 오늘을 살아내야 하는 절실한 일상의 문제였다.

   오랫동안 쓸모라는 자로 내 가치를 증명하며 살아왔다. 자식들을 뒷바라지하고, 일터에서 땀 흘리고, 책임을 다하며 내 자리를 확인했다. 그런데 은퇴와 함께 할 일이 줄어들자, 내 존재도 쪼그라든 것처럼 느껴졌다. 외로움의 뿌리는 바로 그 쓸모를 잃어버린 마음에 닿아 있었다. 그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았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다. 쓰고 읽는 것은 외로움을 달래는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이 일도 나이가 드니 몇 시간하고 나면 머리에 부하가 걸려 쉼이 필요하다. 그럴 때면 책을 덮고 집 근처 숲길을 걷는다. 걷기는 빛 가득한 숲속으로 외로운 몸을 이끌고 나가는 마음 운동이다. 걷는 리듬에 몸을 맡기면 외로움을 이길 수 있어 매일 이 길을 나선다.

   꿈은 헛된 욕심이 아니다. 꿈은 앞으로 살아갈 길을 보여주는 등불이다. 작은 꿈을 꾸며 살아온 덕분에 인생의 고비마다 자신을 지탱하고 성장할 수 있었다. 꿈을 꾸는 사람은 외로움을 견디며 내면의 소리를 들을 줄 안다. 집안의 기둥이 될 손주들에게 다른 잔소리는 안 해도 이 말만은 귀가 아프도록 들려준다.

   “꿈을 가져라. 그 꿈을 쫓는 사람만이 아름다운 삶을 살 수 있다.”

   사람은 꿈이 없으면 성장이 멈추고, 성장이 멈추는 순간 늙는다. 기적은 꿈꾸는 사람의 몫이다. 그래서 오늘도 늙지 않기 위해 날마다 책 속에 묻혀 꿈을 꾸며 산다.

   요즘은 동네 경로당도 가끔 찾는다. 비슷한 처지의 노인들이 모여 신세 한탄이나 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의 고독을 다독이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자리라 좋다. 그곳엔 사람 냄새가 나고 생기가 있다. 소소한 텃밭 이야기와 건강 걱정, 자식 자랑을 나누며 하루를 보낸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불러 주는 순간, 흐릿했던 내 모습은 다시금 선명해진다.

  외로움은 밀어내야 할 불청객이 아니라, 묵묵히 건너야 할 인생의 섬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섬을 육지와 연결하는 다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따뜻한 안부 전화 한 통, 이웃을 향한 가벼운 발걸음, 서로의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 주는 일이다. 무엇보다 자신을 오직 '쓸모'라는 도구로만 평가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집은 여전히 적막하고 쓸쓸하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예전처럼 어깨를 짓누르지는 않는다. 정적은 이제 견뎌야 할 벌이 아니라, 자신을 돌보는 소중한 시간으로 바뀌고 있다. 섬은 갇힌 곳이기도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사방이 바다로 열려 있는 기회의 자리다. 바다는 건너갈 수 있는 길이며, 누군가 건너올 수 있는 통로다. 외로움의 안개 속에도 분명 길은 있다. 그 길을 묵묵히 찾아 나서는 일이, 남겨진 삶의 귀한 몫이다.

 

 

 

 

'나의 신작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녁 숲이 가장 깊다  (0) 2026.02.28
침묵이 주는 깊은 문장  (0) 2026.02.15
아내의 숲  (0) 2026.02.04
그해 겨울, 순천만  (0) 2026.01.28
천국의 작은 도서관  (8) 2026.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