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숲이 가장 깊다
안 규수
날마다 숲길을 걷는다. 몇 해에 걸쳐 지리산 둘레길을 돌았고,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제주 올레길도 걸었다. 계절이 바뀌는 동안 발은 쉼 없이 길 위에 문장을 남겼다. 봄의 흙은 부드러웠고, 여름의 숲은 짙었으며, 가을의 길은 낮게 빛났고, 겨울의 산은 말이 없었다. 걷는 일은 몸으로 쓰는 기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에 쥔 펜이 아니라, 두 발이 한 줄씩 글을 써 내려가는 셈이었다.
걷다 보면 생각이 단순해진다. 숨이 차오르고 땀이 흐르면 복잡한 문장은 저절로 사라진다. 남는 건 지금, 이 발걸음뿐이다. 종이 위에서 오래 고쳐 쓴 문장보다 길 위에서 스쳐 간 한 생각이 더 또렷할 때가 있다. 몸이 먼저 이해하고, 마음이 뒤따라 고개를 끄덕인다.
숲의 나무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해가 중천에 뜨면 그늘을 내어줄 뿐이다. 계절이 바뀌면 잎을 떨구고, 다시 때가 오면 새순을 올린다. 갈잎나무와 늘푸른나무는 서로 다를 뿐이다. 어느 쪽이 옳은지 그른지는 숲에서 묻지 않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 몫의 시간을 견딜 뿐이다.
사람들은 소나무를 좋아한다. 사철 푸른 빛을 잃지 않아서일 것이다. 아이가 태어나면 금줄에 솔가지를 꽂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 죽으면 소나무 관에 들어가 흙에 묻힌다. 삶의 처음과 끝에 늘 함께했던 나무다. 숲에 들어가 보면 소나무만으로 이루어진 곳은 없다. 굽은 나무, 속이 빈 나무, 쓰러져 이끼에 덮인 나무가 함께 어울려 숲을 이룬다. 인간 사회와 다를 바 없다.
숲은 비를 받아 두었다가 천천히 내보낸다. 많은 비가 내려도 곧장 흘려보내지 않고, 가뭄이 들면 조금씩 풀어 준다. 그 느린 호흡 덕분에 계곡은 마르지 않는다. 사람의 삶도 그러했으면 싶다. 기쁨이 넘칠 때 다 써버리지 않고, 힘겨운 날을 위해 조금 남겨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는 스스로 자리를 옮기지 못한다. 씨앗이 떨어진 곳이 평생의 자리다. 흙이 얕아도, 돌이 많아도 그곳에서 뿌리를 내린다. 도망칠 수 없기에 버틴다. 물러설 수 없기에 더 깊이 파고든다. 그 단순한 이치가 오래 마음에 남는다. 몇 해 전 황산을 찾은 적이 있다. 깎아지른 바위틈에 소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흙 한 줌 없어 보이는 자리였다. 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꺾일 듯했지만, 나무는 벼랑 끝에서 푸른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 앞에서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자라던 때, 가진 것은 많지 않았지만, 물러설 곳도 없었다. 형편을 탓하기보다 그날의 일을 마치는 것이 먼저였다. 그 시간이 몸 어딘가에 남아 지금까지를 떠받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황산의 소나무를 보며 지나온 삶이 겹쳐 보인 까닭도 그 때문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몸은 예전 같지 않다. 큰 수술 이후 여기저기 성한 곳이 줄어들고, 넉 달에 한 번씩 병원을 찾아 검진을 받는다.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잠시 흔들린다.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길 위에서는 단순하던 질문이 일상으로 돌아오면 무거워진다.
삶이 힘겨울 때면 고향의 가족 묘소를 찾는다. 풀을 매고 흙을 고르며 한참을 앉아 있으면 생각이 차분해진다. 먼저 간 이들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 본다. 그들도 한때는 오늘의 나처럼 하루를 걱정하며 살았을 것이다. 결국은 모두 저 자리에 누웠다. 그 사실이 두렵기보다 오히려 담담하게 다가온다. 사람의 길도 나무의 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강물은 쉼 없이 흐르지만 강이라는 이름을 잃지 않는다. 구름은 흩어져도 하늘은 그대로다. 머문다는 것은 멈추는 일이 아니라,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일인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앞으로 가는 그것만이 사는 일이라 여겼다. 지금은 제자리에 서서 숨을 고르는 시간이 더 소중하다.
저녁이 내려앉는 숲에 서 본 적이 있다. 낮 동안 떠들던 새소리가 잦아들고, 바람도 한결 느려진다. 빛이 옅어질수록 숲은 오히려 또렷해진다. 나무의 윤곽이 어둠 속에서 더 깊이 드러난다. 숲이 깊어지는 것은 빛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남은 빛을 끝까지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돌아보면 인생도 그러했다. 한낮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눈에 들어온다. 오래 곁에 있었던 사람, 무심히 지나쳤던 하루, 이미 손안에 쥐고 있었던 평온함.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나서야 그것들이 보였다.
이제 내일의 태양을 서둘러 기다리기보다, 오늘의 저녁을 온전히 맞이하고 싶다. 어둠이 온다고 해서 길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속도가 느려질 뿐이다. 그 느린 걸음 속에서 비로소 숨결이 고르고, 마음이 깊어진다.
저녁 숲이 가장 깊다.
그 깊음은 어둠 때문이 아니라, 어둠까지 제 몫으로 받아들이는 나무들 때문이다. 삶 또한 그러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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