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 전 반 담임 선생님을 모신 저녁 회식 자리는 이날 주빈이신 노진 선생님 옛 기벽에 대한 추억으로 처음엔 그 분위기가 그저 유쾌하기만 하였다.
노진 선생님은 그러니까 50년대 초중반 전란의 혼란과 궁핍 속에 어렵사리 중학생모를 쓰게 된 우리 중학교 1학년 3반 담임 선생님이셨다. 그런데 중학교 초년 시절 그 남녘 도시 노진 선생님은, 새 교풍과 학과목, 근엄한 표정의 선생님들 앞에 어딘지 기가 조금씩 움츠러든 반 아이들, 특히 이곳저곳 벽지 시골에서 올라와 낯선 도회살이를 갓 시작한 심약한 지방 출신 아이들을 친구처럼 즐겁게 잘 보살펴 주신 분이었다. 한 예로, 방과 후에 뒤에 남아 빈 교실을 정리해야 하는 청소 당번을 몹시 싫어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그날그날 종례시간에 갑작스런 벌칙을 마련하여 거기에 해당하는 아이들로 하여금 그날 청소 인원을 충당하곤 하시는 식이었다.
“오늘 아침 운동장 조회 때 똑바로 줄 서지 않았다가 나한테 호명 당한 일곱 명 일어서 봐…. 너희가 오늘 청소 당번이다.”
“오늘 체육 시간에 체육복 안 입고 나간 사람 0 명 있었다는데, 누구누군가…. 너희들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 녀석들인 줄 알고 있겠지?”
항상 그런 식이셨다. 어떤 땐 갑자기 책가방 속을 검사하여 놀이용 구슬을 가지고 다니는 아이들을 골라내시기도 하였고, 어떤 땐 저고리 단추나 이름표가 조금 비뚤어진 아이들을 억울하게 골탕먹이시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선생님이 종례 들어오시는 걸 모르고 미처 자리에 앉지 못한 아이들 이름이 줄줄이 불리게 될 때도 있었고, 그게 그날 청소 당번이 될 줄 알고 미리 선수 쳐 “너희들 오늘 청소 당번!”하고 말했다가 오히려 선생님 ‘교편을 모독한 죄’나 ‘남의 불행을 악용하려는 죄’로 먼저 걸린 아이들을 대신해 엉뚱하게 청소 당번을 하게 되는 고역을 떠안게 되는 수도 있었다.
또 책가방 속에 만화책을 숨겼다가 들통이 난 아이는 그 허물로 공부를 소홀히 한 죄, 중학생 품의를 떨어뜨린 죄, 선생님 주의를 어긴 죄 그리고 선생님을 속이려 한 죄에다 자신의 죄목을 헤아려 보라고 했을 때 ‘선생님의 비상한 눈치와 비행 탐지력을 알아보지 못한 죄’를 빠뜨린 허물로 ‘자신이 반성해야 할 죄 가짓수도 다 알지 못한 죄’까지 더하여 일주일 동안 연속 벌 청소를 선고받은 아이까지 있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언제 어디서 어떤 벌칙으로 그날 청소 당번이 정해지게 될지 몰라 선생님 앞에선 늘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긴장이나 원망을 부를 리는 없었다. 그렇게 떠맡게 된 청소 당번이 그다지 억울하거나 짜증스러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일종의 즐거운 유희나 게임 같은 것이었고, 우리들 첫 학교생활도 그만큼 부드러운 안정을 얻어 갔다.
그런데 어느 날 오후 노진 선생님께서 그간 정년퇴직을 하고 지내시다 이번에 며칠 간 서울에 머무르고 계시다는 한 옛 반 친구 전화 통문이었다. 거기다 전에도 가끔 찾아뵌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이번 기회에 옛 반우들이 함께 선생님을 모셔 보자는 의견에 따라, 서울에 머무르고 있는 옛 제자 7, 8명이 모처럼 선생님과 함께 하게 된 자리가 이날 회식 자리였다.
그러니까 그 시절 그런저런 반 관리나 아이들 지도법을 무슨 싱거운 기벽쯤으로 말하기는 뭣하지만, 어쨌거나 그 같은 선생님에 대한 추억들로 이날 회식 자리는 처음엔 그 분위기가 썩 부드럽고 즐거운 편이었다. 그런 모임 자리가 대개는 그런 식이듯 어딘지 좀 싱겁고 의례적이기까지 한 느낌마저 없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런데 몇 순배 술잔이 비워지고 식사가 나왔을 때부터는 그런 분위기가 갑자기 달라지기 시작했다. 선생님은 그때 상을 보아 주고 나가는 심부름꾼 아이에게 빈 그릇 하나를 더 부탁하여 당신 밥을 미리 반쯤이나 덜어내고 식사를 하셨는데, 그것을 보고 한 친구가 무심히 아는 체를 하고 나선 것이 그 첫 사단이었다.
“근력이 썩 좋아 보이시진 못한 편이신데 진지라도 좀 많이 드시지 않으시구요.”
“전에도 선생님께선 늘 수저를 드시기 전에 먼저 진지를 많이 덜어내시던데 혹시 소식 요법이라도 계속하고 계신 거 아니신지요?”
먼저 친구에 이어 그동안 몇 차례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던 다른 한 친구까지 뒷말을 거들고 나서는 소리에, 선생님은 처음엔 별로 대수롭잖은 일처럼 가벼운 웃음기 속에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셨다.
“ 아니 이 나이에 무슨 건강 요법은…. 어쩌다 몸에 익어진 내 젊었던 적부터 버릇이랄까….”
그런데 그 다음에 선생님 표정이나 말씀이 좀 심상치가 않아 보이셨다.
“문상훈군…. 내 자네한텐 아직도 할 말이 없네. 그래, 자넨 그동안 큰 어려움 없이 잘 지내왔던가?”
제자들 물음에 왠지 대답을 흐리고 계신 듯 싶던 선생님 눈길이 무심결에 문상훈이라는 한 운수 회사 봉직의 친구에게로 흐르시더니, 무언지 마음속에 혼자 묻어온 생각이 있으신 듯 그에게 조용히 묻고 계셨다. 선생님 어조나 표정 속에 분명 이때까지와는 다른 어떤 그윽하면서도 새삼스런 감회 빛이 어리고 있었다. 더욱이 일견 범연스레 보일 수 있는 선생님 물음 앞에 문상훈도 역시 이상하게 얼굴색이 붉어지며 다른 때 그답지 않게 목소리가 숙연해지고 있었다.
“ 예, 선생님. 저야말로 그동안 선생님 은덕으로 자신을 이만큼이나마 이끌어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전 선생님께서 그때 하신 말씀을 오늘까지 이렇게 잊지 않고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얼핏 들으며 무슨 선문답 같은 주고받음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이내 그 곡절을 알게 됐다. 동시에 그 옛 시절 선생님의 또 다른 유희성 단속 놀음 한 가지를 떠올리고들 있었다. 다름 아니라, 그 시절 선생님은 우리들 점심 도시락 단속에 유난히 더 열을 올리고 계셨다. 거의 종례 시간마다 도시락통을 검사하여 점심을 거른 아이들에게 예의 벌 청소 일을 떠맡겨 버리곤 하셨다.
선생님은 장난기를 띠시며 벌 청소감을 찾아내셨지만, 그 어려운 시절 자취방을 얻어 지내는 지방 출신 아이들이나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그것이 여간 힘들고 거북한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건강을 보살펴 주시려는 선생님 뜻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점심을 거르고 지내야 하는 몇몇 아이들에겐 그 서글픈 허기 속에 벌 청소까지 안겨 주는 선생님 처사가 더없이 비정하고 원망스럽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 선생님 잦은 도시락통 검사 행사가 언제부턴가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게 되고 말았다. 어느 날 행사 중에 일어난 한 무참스런 사건을 계기로 해서였다. 그날도 선생님은 종례시간에 예의 벌 청소꾼을 모으기 위해 점심을 거른 아이들을 색출해 내고 계시던 중이었다.
“선생님, 문상훈은 도시락을 싸 오지 않았으면서도 일어서지 않고 있어요.”
종례 시간 들뜬 분위기에다 벌 청소를 할 아이들 수가 모자라는 것을 보고 상훈의 바로 뒤쪽 자리에 앉은 녀석이 제 앞 친구를 장난삼아 고해바치고 나섰다.
그런 고자질에 상훈은 제 책상 위에 꺼내 놓은 도시락통을 증거로 얼굴을 붉혀가며 마구 화를 내었다. 그러자 기왕 말을 꺼낸 뒷자리에 앉은 고발자도 지지 않고 가차없는 증언을 계속했다.
“도시락은 늘 가지고 다니지만, 난 네가 한 번도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꺼내 먹는 걸 못 봤다. 넌 종례 시간에만 도시락을 내놓고 벌 청소를 빠지더라….”
드디어 선생님께서 미심쩍은 얼굴로 그 사실을 확인하러 상훈에게 다가가신 건 그때로선 매우 당연한 절차였다. 그리고 도시락통 뚜껑을 열어 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상훈이는 우물쭈물 조금 열어 보인 그 도시락통 속사정은 선생님만이 비밀을 아신 채 두 녀석 간 다툼은 그것으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상훈의 도시락통 속을 들여다보시고 난 선생님은 그날 청소 당번도 다 정해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반 교실을 나가 버리신 것이었다.
그 뒤로 선생님께서 그 일을 다시 입에 담으신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선생님의 가혹한 도시락 검사와 점심을 거른 아이들 벌 청소제가 사라진 것은 바로 그 일이 있은 이후부터였다.
그 뒤로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은 것은 우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말을 하지 않더라도 그 두 녀석 간 승패나 선생님만이 보고 마신 도시락통 속 비밀은 모를 사람이 없었다.
다만 우리는 그 뒤 선생님께서 상훈을 따로 불러 스스로 은밀히 약속하신 일이 있었던 것을 몰랐을 뿐이다.
“이제는 그때 일을 털어놓아도 큰 허물이 안 될 일 같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며칠 뒤엔가 선생님께선 조용히 교무실로 저를 불러 말씀해 주셨지요.”
서로가 한동안 아릿한 회상에 젖어 있던 선생님과 반 친구들 앞에 상훈은 이제는 모두 같은 생각이 아니겠느냐는 듯 거두절미 침묵을 깨고 그때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이제부터 나는 매기 내 밥그릇 절반을 덜어 놓고 먹기로 했다. 비록 너나 네 어려운 이웃들에게 그것을 직접 나눌 수는 없더라도 누가 너를 위해 늘 자기 몫 절반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라. 그 밥그릇 절반만큼만 마음이 언제고 네 곁에 함께 하고 있음을 알고 앞으로 어려움을 잘 이겨 나가도록 하여라…. 선생님께선 그 몇 마디 말씀과 함께 제 등을 한 번 툭 건드려 주시는 걸로 다시 저를 돌려보내 주셨지요. 그리곤 다신 그 일을 아는 척을 않으셨고요…. 하지만 전 그 뒤로 언제 어디서나 선생님의 절반 몫 양식을 제 곁에 가까이 느끼며 지내 왔습니다. 그리고 선생님 사랑과 은덕은 저뿐만 아니라 여기 우리가 모두 그간 알게 모르게 함께 누려 왔을 것으로 믿고 있고요. 하지만 전 선생님께서 그때 일을 잊지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늘 그렇게 지내 오고 계실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바로 선생님의 그 덜어 놓기 ‘버릇’ 내력이었다. 말할 것도 없이 그건 어쩜 ‘소식 건강요법’이나 어쩌다 몸에 익힌 당신 ‘버릇’이기보다는 너무도 벅차고 뜨겁고 자애로운 '은애' 사연이었다.
싱거울 만큼 유쾌하기만 하던 회식 분위기에 새삼스레 숙연한 감동이 깃들었을 것은 당연한 노릇이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그것이 외려 더 불편하고 쑥스러우신 듯 어정쩡한 어조로 그 이야기 뒤끝은 맺고 계셨다.
“그야 내 딴에 제법 생각이 없었던 일이 아니었지만, 아직 너무 세상사를 몰랐었다 할까…. 그런 일을 당하고 보니 나 자신이 너무 설익고 모자라 보이기만 하더구먼. 그래 무슨 교육자랍시고 제 설익은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기보다, 우선 내 지진 몫부터 절반만큼씩 줄여 나눠 가져 보자는 생각에서였을 뿐인데, 그것을 그렇게 크게 받아들여 주었다니 내가 외려 고맙고 민망스러워지네 그려. 하긴 나도 그 덕에 좋은 건강법을 익힌 셈이고, 요즘같이 교육계가 난경을 빚고 있는 마당에선 제 몫 밥그릇을 절반으로 줄여 살기도 쉬운 일만은 아닐 것 같아 보이네만. 그렇다고 그게 어디 이런 식의 치하까지 받아야 할 일인가. 허허….” **
이청준 소설가, 대학교수
1939년 8월 9일 (전남 장흥군) ~ 2008년 7월 31일 (향년 68세)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외 2건
1965년 소설 '퇴원' 2008 금관문화훈장 외 9건
1999 한일 문화교류회의 위원 외 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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