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표 하나가 사라졌다.
한 수필지에 실린 나의 글을 무심히 읽던 중이었다. 마지막 즈음 어느 문장에 넣어둔 쉼표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쉼표를 데리고 있던, 쉼표를 불러들인 말은 ‘자유’였다.
‘...자유, 라고 말입니다.’ 가 ‘자유라고 말입니다.’로 되어있음을 알아차린 순간 좀 쓸쓸해졌다. 그곳이 쉼표가 어울리는 자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쉼표를 둘 때의 내 마음은 자유를 말하면서 숨을 길게 내쉬고 잠시 자유의 뜻을 음미해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유라는 말을 향하여 내리 흘러왔던 강물 위에 힘을 빼고 얹혀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자유를 내뱉는 나와 자유를 읽는 이가 함께 고요히 마음에 자유를 새겨보고 싶었다.
그래, 걸을 수 있다는 것은 자유지.
몸의 자유와 마음의 자유는 얼마가 친한가.
난 지금 자유구나.
음, 자유...
함께 흘렀다면 쉼표가 있던 자리에서 이러한 마음이 들 것이므로 그곳에 쉼표를 넣어두었다. 쉼표에서 읽는 이의 날숨이 더 길어지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내가 제대로 이끌지 못한 것이며 나의 마음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은 것이다. 친구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다가 어디쯤에서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바람도 맞고 싶은데 내 마음을 모르는 친구가 바쁘다며 손을 놓고 가버릴 때처럼 서운했다.
‘쉼표를 연주하라.’
기타를 처음 접하고 악보를 더듬거리며 줄을 튕길 때 자주 듣던 말이다. 쉼표는 연주를 쉬라는 표식이 아니며 음표와 마찬가지로 연주한다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쉼표는 리듬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쉼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곡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다. 쉼표의 와중에도 마음에는 앞서 흘렀던 곡조가 끊이지 않고 흐르고 있어야 한다. 쉬는 동안 마음이 격앙될 수도 있고 정리될 수도 있다. 혹은 바로 앞 음표의 느낌을 그대로 붙잡고 있다가 쉼표 다음 음에서 맺힌 마음을 풀어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악기 하나를 알아갈수록 음표뿐 아니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 아름다움의 비밀이 있음을 이해하게 된다. 두 음 이상에서는 반드시 사이가 존재하며 두 개의 음과 한 개의 사이, 이 셋이 어우러져 의미가 완성되는 것이다. 쉼표를 사이에 둔 두 음도 마찬가지다. 화음과 화음 사이의 이론을 다루는 화성학을 들여다보아도 그러하다. 하나의 화음 뒤에 어떤 화음이 오는가에 따라서 이전 화음의 의미가 달라지며 그 달라진 의미는 화음과 화음 사이 틈새에서 흐른다. 음표에 없는 무언가가 쉼표와 음들 사이에서 내내 흐르고 있다.
그래서일까. 연주자의 내공은 단순하고 쉼표가 많은 곡에서 더 잘 드러난다. 그것은 음과 음 사이를 비롯한 쉼표에 대한 연주자의 해석의 힘이 아닐까. 쉼표의 미세한 시간 차이, 쉼표 동안의 연주자의 눈빛과 몸짓, 쉼표의 해석에 따라 달라지는 그 다음 소리의 질에 따라 곡 전체의 느낌이 달라진다. 훌륭한 연주자는 쉼표가 있는 부분에서 청중을 놓아주지 않는다. 더 강하게 붙들고 있다. 연주자와 청중은 같이 연주하고 같이 쉬면서 한 리듬을 타고 음악 속으로 빠져든다.
삶을 각자의 악보를 연주하는 것으로 여겨도 아름답겠다.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주법과 해석으로 제 악보를 연주하는 중이다. 쉼표가 없는 악보는 없다. 불현듯 주어진 빈 시간, 실패 이후의 고통의 시간, 삶의 여러 책무에서 벗어난 시간이 바로 쉼표이다. 쉼표는 쉼표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음표이기에 마음을 다해 연주해야 할 것이다.
악보 속의 쉼표와 문장 안의 쉼표, 모두 중요하고 아름다운 표식이다. 쉼표 하나가 사라진 날 하루가 조금 가라앉은 것은 아마, 같이 걸을 사람보다 같이 쉴 수 있는 사람이 그립기 때문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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