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싶은 수필159 우산 우산 정승윤 비가 온다. 비는 가는 것도 내리는 것도 아니며 나에게로 오는 것이다. 내 유폐의 방을 향하여 다가오는 것이다. 비가 나를 부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외출할 채비를 한다. 비에 젖지 않기 위하여 챙기는 우산이지만 어쩌면 비에 젖기 위하여 챙기는 우산일 수도 있겠다. 혼자서 궂은 하늘 아래 우산을 펴는 마음이 고적하다. 이 외딴 곳에서 아무도 불러줄 이 없이 혼자 있다는 건 어쨌든 잘 못 살았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나의 실언이거나 악행이거나 부덕함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나의 고독함에는 다분히 자초(自招)의 흔적도 묻어 있다. 우산을 편다. 멀리 자우룩이 젖어 있는 산자락이 보인다. 우산을 펴자 비로소 빗소리가 들린다. 비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선명하다. 우울하면서도 여일(如一)하다. 차가.. 2022. 11. 22. ‘라떼’는 ‘말’이야 ‘라떼’는 ‘말’이야 서금복 밤 10시쯤 전화벨이 울렸다.출근길에 통화했으면 됐지 뭐 하러 밤에 또 하나 싶어서 건조한 목소리로 “왜?” 했더니 “엄마!” 하는 목소리가 축축하다. 오래전, 부대에서 동계훈련을 받고 들려줬던 목소리와 똑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아들은 며칠 동안 혹한과 싸우다 그만 동상에 걸려 병원에 왔다고 했다. 그때 “엄마!”라고 부르던 그 목소리와 닮은, 괴롭고 지친 목소리였다. 그 후에 이런 목소리를 들려준 적이 없었는데 웬일인가 했더니, 직장 생활 10년 만에 자존감이 이렇게 무너지긴 처음이라고 했다. 주말에도 출근해야 하는 일의 양도 양이지만, 그보다는 무조건 ‘나 때는 말이야’로 밀어붙이는 힘을 막아내기 버겁다고 했다. ‘오죽하면 내게 전화했을까’ 싶어 이것저것 물.. 2022. 11. 16. 햇빛 마시기 햇빛 마시기 최원현 “마셔 보세요!” k원장이 내놓은 것은 투명한 유리잔이었다. 묵직했다. 그러나 무얼 마시라는 걸까. 유리컵 안엔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았다. “마셔보세요!”다시 독촉을 해왔다. “오전에 제가 한 번 마셨으니 가득 차 있지 않을지도 몰라요.” 컵을 입으로 가져가‘훅’하고 들이마셔 봤다.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햇빛이에요.” 그녀의 설명이었다. 내가 지금 마신 건 창가에 쏟아지는 햇빛을 받아둔 것이란다. 좀 맹랑하단 생각이 들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재미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햇빛을 내 속으로 들여보내준다?그러면 내 속에선 어떻게 반응할까. 갑자기 들어온, 아니 한 번도 보지도 느껴보지도 못했던 한 밝음이 어둠 속의 그들에게 순간적으로 다가.. 2022. 11. 16. 나무 / 이양하 나무 / 이양하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탓하지 아니한다.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 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을 안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날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움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 2022. 10. 30. 이전 1 2 3 4 5 6 7 8 ··· 4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