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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수필159

치매 / 정승윤 치매 / 정승윤 쌍소나무가 지나면 바다가 보였다. 이제는 쌍소나무를 지나야만 바다가 보인다. 시뻘건 황토 언덕 너머가 고향이었다. 황토 언덕을 넘어야 고향에 갈 수 있다. 고향집에는 섶 울타리가 있었다. 반드시 섶 울타리 하나를 넘어야 고향집이다. 검은 색 폴라를 입은 앳된 소녀를 사랑했었다. 나는 오늘도 검은 색 폴라를 입은 앳된 소녀와 사랑에 빠진다. 내 집에서 내 가게로 가는 길에는 후박나무 가로수 길이 있었다. 긴 가지들이 서로 엮어져 있어서 어떤 집의 대청마루처럼 시원했다. 저녁에 아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올 때면 하루가 일모 속에서 고운 가루로 빻이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후박나무 가로수 길을 지나야 나의 집이다. 아내가 옆에 있어야 하루 해가 진다. 아내가 없으면 하루가 가지 않는다. 밤이 되.. 2023. 12. 9.
집 / 정승윤 집 / 정승윤 허공에 내 집 한 채 지으리라. 들판에 만연한 들불에도 불붙지 않는 내 집 한 채 지으리라. 불붙어 다 타버리고도 남아 있을 집 한 채 지으리라. 아무나 드나들 수 있고 아무나 부술 수 있어도 나만이 등 뒤로 닫을 수 있는 그런 문짝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대기권을 벗어나지도 않고 지상에 속하지도 않는 그 중간 어디 쯤에 내 집을 지으리라. 바람과 구름 그 어디쯤에 집 한 채 지으리라. 세상의 바람이 다 불어도, 세상의 물이 다 범람해도 꺼지지 않는 촛불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나 혼자 춤추며 나 혼자 눈물 흘리는 그런 고요한 식탁이 있는 집 한 채 지으리라. 세상의 노염에 불붙지 않고 세상의 질투에 무너지지 않는, 이 세상에 없는, 이 세상의 집 한 채 지으리라. 오직 그대만을.. 2023. 12. 9.
죽음 앞에서 / 정승윤 죽음 앞에서 / 정승윤 비가 내리고 있었다. 초원에서 말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그들의 갈기는 바람에 날리고 있었고 그들의 구리빛 동체는 늠름하게 빛나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순간 나는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 마저 잊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신화 속의 동물들처럼 보였다. 거기에 비해 나라는 존재는 얼마나 초라한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나는 우산을 펴야 했고 또 우비를 입어야 했다. 바람이 강하게 부는 해안에서는 우산은 거의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나는 곧 우산을 접고 우비만으로 버텨야 했다. 바다 쪽을 보니 높아진 파도가 바위들을 거칠게 때리고 있었다. 하얀 머리의 짐승들이 미친 듯이 포효하며 해안을 물어뜯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낮임에도 불구하고 바닷가는 이미 죽음에 의해.. 2023. 12. 9.
기쁨이 / 정승윤 기쁨이 / 정승윤 고양이 이야기를 하기 전에 배경이 된 우리 가게 이야기를 잠깐 하겠다. 가게는 원래 장모님이 사시던 집인데 지금은 개조하여 가게로 쓰고 있다. 그래서 돌담도 있고 마당도 있다. 우리 부부는 아침이면 가게에 출근하고 해가 지면 퇴근한다. 그래서 밤에 고양이들이 가게에서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 수가 없다. 길고양이 '나비'가 가게 항아리 뒤편에 새끼를 낳았다. 처음에 일곱 마리를 낳았는데 한 마리는 이미 죽어 있었다. 나비는 우리가 새끼들을 위하여 담요를 깔아주는 걸 돌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더니 다음날 새끼들을 감쪽같이 감춰버렸다. 우리 부부가 그들을 거의 잊을 무렵 나비가 새끼들을 거느리고 가게에 다시 나타났다. 새끼들은 아직 숫기가 없어서 숨기 바빴고, 그래서 우리는 몇 번이고 그 수를.. 2023. 12.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