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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작 수필46

풍경風磬 달다 풍경風磬 달다 / 안규수 바람은 오랜 친구다. 보이지 않고 잡을 수도 없다. 미지의 머나먼 숲에서 출발해서 스치듯 금세 어디론가 사라진다. 바람만 그럴까. 내 마음이 그렇고, 인생이 그렇다. 존재했다가, 찰나인 듯 사라지는 게 바람을 닮았다. 그런 바람을 만나는 방법은 따로 있다. 지난여름 제주 영실 계곡 깎아지를 듯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 병풍바위 쉼터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이마를 씻어 주고 가슴에 안기는 바람, 그 시원한 맛은 나만이 안다. 바람은 혼자 오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그 무엇과 함께 온다. 봄바람이 사랑스럽고 가을바람이 쓸쓸한 건 온도 차 때문은 아니다. 바람에는 직감으로 알게 되는 어떤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운주사 와불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에 그대 가슴의 처마 끝에 풍경을 달고 .. 2023. 12. 1.
팽이를 다시 치고 싶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닐 때 동요 계수나무를 부르면서 자랐다. 지금은 어떤가? 달에 사람이 다녀오면서 계수나무는 사라지고 없다. 세계의 허파라고 하는 아마존강 밀림을 개간한다는 명목으로 불태워 원숭이 두창이 오고, 동굴에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박쥐 서식지가 파괴되어 코로나 병균이 세상을 공포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월든』에서 “나는 숲으로 갔다. 천천히 살며 오직 삶의 본질만 마주하고 삶이 내게 가르쳐 준 것 중에서 배우지 못한 것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마침내 죽게 되었을 때 제대로 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지 않기 위해서 나는 숲으로 갔다.”라고 했다. 소로가 생각하는 그 숲은 안타깝게도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농촌에 사는 축복 중의 하나는 시공간적 여유다, 하지만 현실은 그.. 2023. 12. 1.
천년고도 시안西安 중국의 5000년 역사를 보려면 시안을 가보라는 말이 있다. 실크로드의 시발지인 시안은 죽기 전에 꼭 가보고 싶은 나의 버킷리스트였다. 당나라 때 장안으로 불리기도 한 시안은, 비옥한 관중 평야의 웨이허강 이남에 위치해 일찌감치 중국 문명의 발상지이다. 주나라를 포함 진, 한, 당 등 13개 왕조가 1,100여 년 동안 수도로 삼으면서 고풍스러운 도시가 지하 박물관이라 할 정도로 유적이 많다. 이탈리아의 로마, 이집트의 카이로, 그리스의 아테네와 함께 ‘세계 4대 고도’로 선정된 도시이다. 첫날, 시안 시내 비림碑林 박물관 관광에 나섰다. 비림은 송나라 때부터 수집한 비석1,000여 점을 보유하고 있다. 총 7개 전시실에 진나라부터 당나라까지의 국보급 서예 작품이 총망라되어 있다. 글과 그림을 새긴 비석.. 2023. 12. 1.
장무상망長無相忘 제주 추사 김정희 적거지기념관 앞에서 나는 한동안 말없이 서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의 나목, 둥그런 창문 있는 작은 집이 매운 제주의 찬바람 속에 떨고 있다. 세한 속에서 얻은 불가사의 해탈과 무한 광대하고 둥근 깨달음은 텅 빈 하늘을 빨아들인 신묘한 힘이었다. 대정읍 성 동문 안쪽에 자리 잡은 이곳은 기념관과 초가 4채가 있고, 시 서화 등 작품 탁본 64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1834년 순조의 뒤를 이어 어린 헌종이 즉위하고, 순원왕후 김 씨가 수렴청정하던 때, 추사는 10년 전 윤상도의 옥사에 다시 연루되어 9년 동안 제주도에 유배된다. 섬에 위리안치된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귀양살이하는 스승을 숭모하고 따르는 제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중인 출신 .. 2023. 12.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