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작 수필43 잔인한 달, 3월 잔인한 달, 3월 / 안규수 봄꽃이 한창이다. 팍팍하게 살다가도 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곱지 않은 꽃이 없다. 잠시라도 봄 소풍을 다녀와야 할 분위기다. 고향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처럼 설렘이 앞선다. 오래 객지에 머물다 가끔 귀향길에 나서는 나그네로선 그 경쾌한 발걸음이며 달뜬 심경을 무엇에 비기랴. 그런데도 고향이 가까워지자 한결 두려워진다. 어릴 적 동무들과 뛰어놀던 무지갯빛 동심은 오간 데 없고, 골목은 깊은 침묵에 묻힌 적막강산이다. 마을 언덕에 자생하는 들꽃은 옛 모습 그대로 피어 있다. 순박하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생명력도 옛 모습 그대로 변함없다. 봄이 오면 잎새는 얼었던 땅을 비집고 나와 눈이 부시도록 대지를 푸른 새 생명으로 뒤덮던 쑥부쟁이, 강아지풀, 질경이, 안개꽃, 쥐오줌풀, .. 2023. 9. 18. 어머니 수석水石 어머니 수석水石/ 안규수 제주는 꿈의 섬이다. 짧은 가을 해가 설핏한 날, 나는 제주 한라산 중산간에 있는 수필가 K의 고향 마을을 찾아갔다. 작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에서 뜻밖에 넓은 밭에 수없이 얽히고설킨 밭담을 만났다. 마침 밭에서 일하시는 마을 어르신을 만나 이런 밭담은 언제 어떻게 쌓았는지 물었다. “이런 돌담은 이 마을이 생긴 지 500년쯤 되니 그때부터 쌓은 거지.” 화산섬 제주도는 돌의 고장이다. 제주도 어딜 가나 흔하게 볼 수 있는 돌담은 화산석 현무암이다. 최근 많은 사람이 찾고 있는 올레길이나 치유의 숲 등 중산간 지대에도 돌담은 흔하게 볼 수 있다. 섬의 특성상 물을 저장하지 못해 농사짓기에는 불리한 환경이지만 사람들은 돌을 활용하여 슬기롭게 살아왔다. 제주에서는 돌담 쌓는 일.. 2023. 9. 18. 부석사의 선묘善妙사랑 부석사의 선묘善妙사랑 / 안규수 산빛이 곱다. 숲은 푸르게 견디어 온 시간을 잊고 한철 붉어지기로 했다. 숲의 기운에서 발화한 빛깔로 속세의 티끌 같은 각질을 털고 저리 아름답게 물들겠다고 하니 이 얼마나 신비롭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 늦은 오후 영주 부석사 浮石寺에 당도했다. 고해의 산맥을 넘어온 들녘에서 푸른 절벽처럼 우뚝한 절은 노을에 젖어 있다. 소백 연봉 뒤로 저무는 석양이 무량수전에 비치어, 일몰의 부석사는 깊은 침묵에 묻혀 있다. 부석사 안양루에서 소백 연봉은 말 떼가 질주하듯이 출렁거리면서 지평선 너머로 달려간다. 이 산하는 흔들리는 산하였고, 부석사의 ‘뜰 浮’ 자처럼 떠 있는 산하였으며, 그 저무는 산하를 바라보는 나는 물오리처럼 거기에 빠져서 숨을 헐떡이며 자맥질.. 2023. 9. 18. 매혹의 순간들 매혹의 순간들 안규수 나는 누구인가? 스스로 하는 질문이다. 나는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면서 나인 것처럼 지금까지 살아왔다. 어린 시절 유난히 여리고 몸이 허약했다. 나의 젊은 시절은 일탈과 모험보다는 인내와 타협을 미덕으로 알고 편협하고 고정된 관념 속에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장차 무엇이 되겠다는, 무엇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이 정처 없이 안개 속에서 헤맨 시간이었다. 군에 입대해서 월남전쟁에 참전하고 제대해 공무원 생활 3년쯤 하다 농협으로 전직하여 평생을 고향에서 농사짓는 농민들 곁에서 일하다 정년 퇴임했다. 그때까지 고향 농민들 앞에서 잘살아보자고 외치고 다닌 것은 입에 달린 말일 뿐 오직 먹고 살기 위한 생활의 방편이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진달래가 피고 냇가.. 2023. 2. 21. 이전 1 ··· 6 7 8 9 10 1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