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68 빈 벽 /정호승 빈 벽 벽에 걸어두었던 나를 내려놓는다 비로소 빈 벽이 된 벽이 가만히 다가와 톡톡 아버지처럼 내 가슴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털어준다 못은 아직 빈 벽에 그대로 박혀있다 빈 벽은 누구에게나 녹슨 못 하나쯤 운명처럼 박혀 있다고 못을 뽑으려는 나를 애써 말린다 지금까지 내 죄의 무.. 2015. 3. 10. 이영옥 '주먹만 한 구멍 한 개' 바람이 자전거의 녹슨 귀를 때렸다 마른버짐이 번져가는 둑을 내려가 아버지는 강바닥을 망치로 깼다 얼음판은 쉽게 구멍을 내주지 않았고 한 떼의 쇠기러기들이 북쪽으로 날아갔다 겨우 주먹만 한 숨통을 뚫은 아버지는 무료한 생이 지나가길 기다렸고 나는 나무토막을 주워 모닥불을 .. 2015. 3. 6. 꽃을 그리는 여자/허문정 꽃을 그리는 여자 얼굴은 다섯 장 꽃잎 몸은 푸른 꽃대궁 그녀의 단물로 목을 축이면 나도 덩달아 꽃이 되지 살구향이 배지 우리도 시들어 더는 꽃이 아닐 때 서로의 마른 꽃대궁 부벼 향기를 지펴주고 정 하나 놓고 가는 환한 열반이면 좋겠어 마음이 꽃이라서 꽃을 그리는 여자 꽃을 그.. 2015. 2. 2. 길을 걷다가/홍윤숙 길을 걷다가 길을 걷다가 잠깐씩 발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잎 떨군 나뭇가지들이 기하학적 선으로 아름다운 문양을 그리고 있는 그 모양이 처음 본 세상처럼 신선하다 묘연한 길 끝 어딘가에 젊은 날의 초상화 한 폭 떠오를 것도 같은 나는 다시 걷는다 가다가 다시 돌아본다 돌아보는 일.. 2015. 2. 2. 이전 1 ··· 7 8 9 10 11 12 13 ··· 17 다음